오규원 - 비가 와도 젖은 자는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

얼마 전, 오규원 시인의 유고시집 '두두'를 샀다.

요즘 출근길에 읽고 있는데, 시인의 마지막 시라는 생각이 강해서인지 제목도 없이 서문에 올려져 있던 짧은 시가 머리에 남아 사실 다른 시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작년 스승의 날을 전후 해서 시인의 소식을 알게되고, 울적한 마음에 긁적거렸던 메모가 어딘가에 남아있을텐데, 오늘 집에 가면 한번 찾아봐야겠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강가에서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 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
다시 한 번 멈추었었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강은 젖지 않는다 오늘도
나를 젖게 해 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 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강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 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고기들은 강을 거슬러 올라
하늘이 닿는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사랑, 짐승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2008/03/11 15:07 2008/03/11 15:07
트랙백 주소http://jackaroe.com/blogV3/trackback/61




페이지 이동< 1 ... 260 261 262 263 264 265 266 267 268 ... 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