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호기 - 우리는 슬프다 / 5월

우리는 슬프다


우린 슬프다. 술 취한 밤 하늘을 날아
나는 너에게로 간다. 가는 척한다.
무선 전화 전파를 신고 공중을 저벅저벅 걸어간다.
네가 나에게 "잘 지냈어?" 하면
"사랑해"였는데, "별일 없어" 하면서
서로의 가슴에 재를 뿌린다.
그리고 서로 할퀸다. 좀더 깊이 상처를 내면서,
상처가 아물기까지라도 기억해달라고.
"가족을 버려!"라고 정색하지 않는다.
삶을 버리랄까봐. 낮에는 각자 일한다.
일로 얼굴 가리고 낄낄댄다.
밤에는 집에 가서 마누라와 애들 앞에
목소리를 깔고 그 위에 앉아 소리없이 말한다.
술 취한 밤. 택시는 잡히지 않고
인적 없는 거리에서 비틀대다 제 그림자를 밟았을 때
그림자의 핏발선 눈초리에 가슴을 쥐어뜯겼을 때
우리는 각자 수화기를 들고 욕설을 주고받는다.
제 탓할 힘이 없어질 때까지
고래고래 고함지른다. 축 늘어져 마른걸레처럼
싱겁게 빳빳해져 집으로 간다.
그게 우리들 사랑이냐?
삶이냐? 고
골목 어둠 귀에는 들리지 않게 낮게 중얼거려본다.
생각해보면 너는 내 그림자 속에만 사는데
니가 내 애인이냐?
검은 그림자가 개같이 어슬렁어슬렁 앞서간다.


처음 시인의 시를 읽었던 것이 아마도 '지독한 사랑' 이라는 시집이었을 것이다.

선배의 자취방에서 그 책을 꺼내 (아마도 제목 때문이었을 것이다.)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은 말로 하기 힘든 그 무엇이었다. 감동이라고 하기엔 좀 낯설고, 감각적이라고 하기엔 좀 지나친듯 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대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세심함과 그 깊이에 소름이 돋았다.

집요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시인의 묘사는 대상의 모습과 감정을 가리지 않고 파고들었고, 시를 읽는 내내 머리 속이 두근두근거리는 느낌으로 책장을 넘겼던 기억이 난다.


5월


태양빛보다 더 환한 벚꽃이 지고 난 자리에
진초록의 머리카락들이 물결치는 5월이었다.
그는 그녀에게서 온 전화를 받고 있었다.
강변의 포플러 어린잎들이 바람에 춤을 추며
손바닥을 녹색에서 은색으로 번갈아 뒤집는 동안
놀람과 두려움에 떠는 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귀를 찔렀다.
창 밖에는 초원빛의 하늘에 숫양 같은 구름들이 한가롭게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뿔을 맞대고 겨루고 있었다.
골목으로 차량들이 느릿느릿 지나가는 동안
그는 그녀에게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책상 위의 물컵이 망토처럼 끌고 있는 그림자를
그의 손가락이 매만지고 있을 때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시계는 그의 심장처럼 여전히 펄떡이며
오후의 순간들을 한 장 한 장 또렷하게 넘기고 있었다.
사무실에 작게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멀리 남쪽 도시에 때 이른 폭염이 상륙했다고 하지만……
눈처럼 흰 그녀의 음성은 그의 피를 얼리며
북극의 얼음바다로 그를 초대했다.
창 밖으로 5월의 흰꽃이 눈보라처럼 흩날렸다.

2008/03/26 15:11 2008/03/26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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