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씨가 있던 자리

2009/11/30 19:01 / Poem

감씨가 있던 자리


냉장고 청소를 하다가
어둡고 시린  냉장고 한구석 조용히 앉아있는 단감 하나를 보았다
언제 사 놓았는지, 아니면 받았던 것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아
잠깐 미안해 하다가
시간이 더 지나면 못 먹게 된다는 생각을 하며,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우스워 혼자 피식거리고는
감을 집어들고 밥상 머리에 앉았다.

6등분을 할까 8등분을 할까 고민 아닌 고민을 하면서 껍질을 깎아내고
접시에 올려 숭덩숭덩 썰어 한 조각 입에 물었는데,
뭔가 이상하다 싶은 생각이 머릿 속에 고이는 순간 입 안에서
톡!하고 감씨가 있던 자리가 튀어올라 저 안쪽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단단하던 그 씨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연주홍 살 속에 박혀있는 자국들을 보고는
누가 쿡쿡 찔러놓은 상처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벌어진 마음 들여다 볼 때마다 그리움으로 아련했던 것들이 그저
가슴 한구석 옹이처럼 박혀있는 추억의 빈 집이라는 것을 알았다.

2009/11/30 19:01 2009/11/30 19:01
Posted by Jackar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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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급속도로 맛이 가기 시작한 핸드폰

특히나 배터리...

하루종일 충전을 해도 연속통화 8분이면 눈금이 바닥을 친다.

틈틈이 핸드폰으로 책을 보는 것도 부담되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이상하게도 보조 배터리를 끼우면 자꾸 재부팅이 되고(뭔가... 접지가 잘 안되는 것 같다.)

깜박거리는 게이지를 볼 때마다 내 인생도 이렇게 바닥나버렸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핸드폰을 산지도 오늘로 1,023일째

그동안 전화번호가 바뀌는게 싫다. 아이폰을 기다린다. 하며 차일피일 버티고 있었지만......

사실 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이제는 진짜 이유조차 의미 없어진지 오래지만, 그렇게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잊기로 했던 날이 481일이나 지나버렸다.

그 사이 난 34살이 되었고, 유난히 시린 6번째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핸드폰이나 바꿔볼까 싶다.

2009/11/18 10:52 2009/11/18 10:52
Posted by Jackar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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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지는 순간


  어두워지는 순간에는 사람도 있고 돌도 있고 풀도 있고 흙덩이도 있고 꽃도 있어서 다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바람이 불고 불어와서 문에 문구멍을 내는 것보다 더 오래여서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하늘에 누군가 있어 버무린다는 느낌,
  오래오래 전의 시간과 방금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을 버무린다는 느낌
  사람과 돌과 풀과 흙덩이와 꽃을 한사발에 넣어 부드럽게 때로 억세게 버무린다는 느낌.
  어두워지는 것은 그래서 까무룩하게 잊었던 게 살아나고 구중중하던 게 빛깔을 잊어버리는 아주 황홀한 것.
  오늘은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얻으러 간 사이 어두워지려 하는데
  어두워지려는 때에는 개도 있고, 멧새도 있고, 아카시아 흰 꽃도 있고, 호미도 있고, 마당에 서 있는 나도 있고..........그 모든 게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개는 늑대처럼 오래 울고, 멧새는 여울처럼 울고, 아카시가 흰 꽃은 쌀밥 덩어리처럼 매달려 있고, 호미는 밭에서 돌아와 감나무 가지에 걸려 있고, 마당에 선 나는 죽은 갈치처럼 어디에라도 영원히 눕고 싶고.........그 모든게 달리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개는 다른 개의 배에서 머무르다 태어나서 성장하다 지금은 새끼를 밴 개이고, 멧새는 좁쌀처럼 울다가 조약돌처럼 울다가 지금은 여울처럼 우는 멧새이고, 아카시아 흰 꽃은 여러 날 찬밥을 푹 쪄서 흰 천에 쏟아 놓은 아카시아 흰 꽃이고.........그 모든 게 이력이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오늘은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베러 간 사이 어두워지려 하는데
  이상하지, 오늘은 어머니가 이것들을 다 버무려서
  서당골에서 내려오면서 개도 멧새도 아카시아 흰 꽃도 호미도 마당에 선 나도 한사발에 넣고  다 버무려서, 그 모든 시간들도 한꺼번에 다 버무려서
  어머니가 옆구리에 산미나리를 쪄 안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세상이 다 어두워졌네.

 
 
너무 긴장을 했는지 끊어질듯 팽팽해진 정신이 좀 풀어질까 싶어 들어간 서점에서 집어들게 된 시집이 문태준 시인의 '맨발'이었다.

시 한편을 읽을 때마다 시계를 힐끗거리고, 심장은 쿵쿵거리고, 해는 구름 사이로 숨었다 나섰다를 반복하면서 내 눈을 두드려대고 ...

도저히 집중할 수 없고, 진정되지 않는 상황에서 유독 이 시 한편이 내 마음을 편안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한참 시를 써보겠다고 손가락을 움찔거리던 시절, 시는 축약되고, 반복되고, 어려운 무엇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렇게 함축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시가 쓰고 싶어졌다.

내 마음을 오롯이 담아내면서도 읽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시.

문득 그런 시가 쓰고 싶어졌다.

2009/11/17 10:38 2009/11/17 10:38
Posted by Jackar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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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갉아먹는 누에


먹지 않으려고
입을 꼭 다물고 손을 내저어도 얼굴을 돌려도
어느새 내 입속으로 기어들어와
목구멍으로 스르르 넘어가버리는 시간
오늘도 나는 누에가 뽕잎을 먹듯 사각사각 시간을
갉아먹고 있다
쭉쭉 뻗어나간 열두 가지에
너울너울 매달린 삼백예순 이파리 다 먹어치우고
이제 다섯 잎이 남아있다
퍼렇게 얼어붙은 하늘가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이제 또 초록 뽕나무 한그루
내 앞에 설 것이다
나는 한 잎씩 깨물어 삼키고
한밤을 자고나면 시간은 똥이 되고 매일 매일
그 똥의 색깔은 다르다
열두 가지에 매달린 삼백 예순다섯 이파리 퇴비되어
내게로 되돌아올 때
꺼풀을 벗은 누에가 번데기 되듯 그 바깥 둘레에 나를
싸주는 집, 명주실 얼굴은? 몇 개나 될까


며칠 전 비가 내린 후로 아침 저녁으로 싸늘해진 날씨 탓에 오늘이 며칠인지는 가물가물해도 '올해가 얼마남지 않았구나......'라는 아쉬움만은 마음 한구석에서 하루하루 커져가고 있었는데, 어제 밤 전순영 시인의 시집을 읽다가 뜨끔해서는 두달 전쯤 작성해 놓았던 '아랫쪽 일상이 정리되는대로 이것저것 가지고 내려와 실컷 읽어야지 목록'를 펼쳐서는 책을 좀 보다가(보는척 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시인의 말처럼 한밤을 자고나면 시간은 똥이 되는데, 똥이 되고 마는데, 지나간 시간 아쉬워하면 뭐하나 싶으면서도 그래도 자꾸 뒤돌아보게 되고, 울컥해서는 소리도 한번 질렀다가 시무룩해서 돌아눕고 그렇습니다. 요즘...

2009/11/03 09:02 2009/11/03 09:02
Posted by Jackar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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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숯기둥 2009/11/03 13:31  Modify/Delete  Reply  Address

    맑은 공기 마시고 계시나요?

    • Jackaroe 2009/11/05 17:15  Modify/Delete  Address

      공기? 그렇게 맑지 않아.. 일하는 곳도 그렇고 사는 곳도 그렇고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거든.
      뭐 자전거 타고 10분만 달려도 논밭이 펼쳐지긴 하는데, 언제나 그렇듯 일에 쫓기다보니 뛰쳐나가기가 쉽지는 않네..^^

  3. 미아 2009/11/04 01:58  Modify/Delete  Reply  Address

    응... 똥이 되는 시간이라...

    • Jackaroe 2009/11/05 17:17  Modify/Delete  Address

      내 스스로 느끼기에 고민이라는 걸 하기 시작한지가 대략 15년쯤 된거 같은데.... (그 이전의 고민들은 잊었거나 좀 애매한 것들이라;;)

      고민의 수준이라는게 도통 발전이 없네.. 물론 해결도..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