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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성 - 저문 강에 삽을 씻고

몇해 전, 그러니까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큰 비가 왔었습니다.

큰아버지는 "지난 밤 어머니가 꿈에 나오셨다." 며 식구들을 소집했고, 산길을 헤치고, 물길을 헤쳐 찾아간 산소는 그야말로 목불인견이었습니다.

산 꼭대기부터 쓸려 내려온 흙은 무지막지한 힘으로 봉분과 비석을 쓸어다 산 아래 냇가에 내팽게쳤고, 우리는 그 속에서 할머니의 비석을 찾아 산을 올랐습니다.

토막난 비석을 무덤 앞에 세우고, 서둘러 봉분을 올리고, 물길을 냈습니다.

그러는 동안 큰아버지는 할머니의 산소 앞에 꿇어 앉아 하염없이 울었고, 아버지는 그런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불만스럽기도 한 모양인지 "그래도 형은 맏이라고 어머니가 꿈에도 나오시네, 나한테는 한번을 안오시더니만..." 라며, 말끝을 흐리셨습니다.

진흙이 덕지덕지 들러붙어 걸음을 걷기도, 흙을 퍼내기도 힘들어진 신발과 삽을 흐르는 물에 씻으면서 등 뒤로 흐르는 흐느낌도 세찬 물줄기에 함께 쓸려내려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2009/01/28 11:26 2009/01/28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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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 즐거운 편지 / 꿈, 견디기 힘든

즐거운 편지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즐겁지 않다.
  즐거운 것이 없다.
    즐겁고 싶지 않다.

생각하는 것조차 힘겨워 뒤돌아 서면,
모든 것이 즐거운 것들 뿐이었던 시절의 나는
여전히 푸르게 웃고 있다.


꿈, 견디기 힘든


그대 벽 저편에서 중얼댄 말
나는 알아들었다.
발 사이로 보이는 눈발
새벽 무렵이지만
날은 채 밝지 않았다.
시계는 조금씩 가고 있다.
거울 앞에서
그대는 몇 마디 말을 발음해본다.
나는 내가 아니다 발음해본다.
꿈을 견딘다는 건 힘든 일이다.
꿈, 신분증에 채 안 들어가는
삶의 전부, 쌓아도 무너지고
쌓아도 무너지는 모래 위의 아침처럼 거기 있는 꿈.

2009/01/09 17:56 2009/01/09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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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 샴푸의 요정

시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1) -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이라는 길고도 왠지 묵직해보이는 책에 올라간 시들이 어떤 것들인가 살펴보다가 문득 '장정일'이라는 이름에 시선이 멈췄습니다.

'많은 시 중에서 어떤 시가 올라갔을까?'하고 살펴보니 '샴푸의 요정'이라는 시가 있네요.

'음..? 샴푸의 요정? 빛과 소금의 노래 제목하고 똑같네? 혹시???'

찾아보니 역시나 이 시가 노래로 옮겨진 것 같습니다. 장정일 시인하면 몇몇 소설들이 이미 영화화 됐고, 시 중에서도 '요리사와 단식가'라는 시가 '301, 302'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된 것은 알고 있었지만, 노래로 만들어졌다는 건 몰랐네요.

마침 점심시간이라 시간도 있고 해서, 서둘러 노래를 수배해 놓고, 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샴푸의 요정


사내는 추리극장이 싫다. 국내 소식이
싫고 운동경기가 싫고 문제의 외화가
싫다. 안 본다. 그리고 방송출연하는
많은 다른 여인들이 역겹다. 나는 그녀만을 본다.
여덟 시 반의 그녀를 기다린다. 보시겠읍니까
15초 동안 그녀는 샴푸회사를 위해
광고하지요. 보시겠읍니까

그녀는 인사를 잘한다. 안녕하셔요
그녀는 미소띠며 속삭인다
파란 물방울 무늬 잠옷을 입고
그녀는 머리를 감아 보인다. 무지개를 실은
동글동글한 거품이 티브이 화면을 완전히
메운다. 그러면 샴푸의 요정이 속삭이는 거지
새로 나온 샴푸, 당신이 결정한 샴푸라고
향기가 좋은 샴푸, 세계인이 함께 쓰는 샴푸
아마 당신은 사랑에 빠질 거예요
라고 속삭이는 것이지

미용주식회사가 있다. 아시아 굴지의
미용주식회사가 있다. 그리고
우리들에겐 요정이 있다. 현존하는 유일한 요정
매일 저녁 여덟 시 반, 티브이 화면을 찢으며
우리 곁에 날아오는 샴푸의 요정. 그녀는 15
초 동안 지껄이고
캄캄한 화면 뒤로 사라진다. 여덟 시 반.
매일 저녁 여덟 시 반에는 그녀가
출연하는 광고가 있다. 기다려 주세요

광고가 끝나면 사내는 무기력하게
티브이를 꺼 버린다. 매일 저녁 15초가 필요할 뿐
사내는 사진을 들여다본다. 짝사랑하는
그녀 사진을 사내는 모은다. 방에 붙이기도 한다
흰 이를 드러내고 웃는 모습. 수영복을 입은 모습
승마복을 멋지게 입은 사진을 그는 모은다.
그리고 칼에 대어 잘라낸다. 샴푸의 요정이
어느 영화에 출연해서 보여주는
곧 입술이 닿으려는 찰나의 남자 배우 입술을
면도날로 잘라낸다.

선전문안이 들끓는 밤 열 한 시
나지막이 샴푸의 요정이 속삭이지 않는가
그녀의 노래가 귓전에 맴돌지 않는가.
쓰세요, 쓰세요, 사랑의 향기를
느껴 보세요. 그리고 그녀의 약속이
가슴속에 고동치지 않는가. 오늘 밤
당신을 찾아가겠어요, 광고 속에서
그녀는 약속했었지. 욕망이 들끓는 사내의 머리통

옷을 벗는 요정. 담배불 자국이 송송한 소파에
비스듬이 눕는 요정. 신비스레 신비스레
가라앉는 요정. 뜨거운 입술로
이리 오세요 예쁜 아기, 속살거리는 요정
환영이 들끓는 밤 열 두 시, 이윽고 샴푸의 요정은
그의 머리를 끌어당겨
냄새를 맡아 본다. 제가 권한 것을 쓰셨겠지요
물론 그러하셨겠지요?

0시 삼십 분. 사내는 샴푸가 아닌
다른 이야기가 하고 싶다. 무언가
시도하고 싶다. 그러나 그녀는 실내화를 끌며
얼마나 잽싸게 달아나는가. 참 잘하셨어요
샴푸는 역시 우리 것이 최고랍니다. 계속
애용해 주세요. 분홍빛 잠옷을 끌며
샴푸의 요정은 사라진다. 아아
좀더 있어 주세요! 좀더!

꿈에서 깨어나
사내는 타자기를 두드려댄다.
딱딱딱딱딱
굴지의 미용주식회사가 있다.
그리고 현존하는 유일한 요정은
샴푸요정이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장정일스럽다고 해야할까? 거침없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됐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최근 1년 사이 제가 벌이고 있는 일련의 행태들이 대상만 조금 다를 뿐 시 속의 사내처럼(시 속에서도 사내는 '나'가 되었다가 다시 '우리'가 되기도 합니다.) 정신적 수음에 헐떡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힘드네요.

시를 읽다가 시를 통해서 제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보게 된 것인지, 그저 괜한 생각을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나오네요.

그 문제는 우선 접어두고, 그저 문득 드는 생각은 장정일 시인의 시를 읽은지가 참 오래됐다는 겁니다.(사실 이런 느낌이 싫어서 의도적으로 피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퇴근길에 한 권쯤 사서 오랫만에 머리 구석구석을 난도질 당해보는 것도 꽤나 이 겨울에 어울리는 일이 아닌가 싶네요.

2009/01/07 15:56 2009/01/07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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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 百年

百年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빈 의자처럼 쓸쓸히 술을 마셨네

내가 그대에게 하는 말은 다 건네지 못한 후략의 말

그제는 하얀 앵두꽃이 와 내 곁에서 지고
오늘은 왕버들이 한 이랑 한 이랑의 새잎을 들고 푸르게 공중을 흔들어 보였네

단골 술집에 와 오늘 우연히 시렁에 쌓인 베개들을 올려보았네
연지처럼 붉은 실로 꼼꼼하게 바느질해놓은 百年아리는 글씨

저 百年을 함께 베고 살다 간 사랑은 누구였을까
병이 오고, 끙끙 앓고, 붉은 알몸으로도 뜨겁게 껴안자던 百年

등을 대고 나란히 눕던, 당신의 등을 쓰다듬던 그 百年이라는 말
강물처럼 누워 서로서로 흘러가자던 百年이라는 말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하루를 울었네


오늘 약속이 있어 대학로에 갔습니다. 그 전에 살 책과 CD가 있어 영풍문고에 들렀지요.

한 권은 찾았는데, 한 권은 없다고 하고, 예전에 있었던 CD 매장은 없어졌더군요. 근처 교보나 반디앤루니스에 갈까 했습니다만, 어차피 종로에서 대학로까지 슬슬 걸어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가다 보면 나오겠지 하고는 걷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걸어 대학로에 도착해서는 약속 장소를 한번 둘러보고는 바로 서점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마로니에 공원부터 성균관 대학교 앞까지 골목 골목을 뒤졌습니다만, 어찌된 일인지 서점이 보이질 않습니다.

한시간 가량을 터벅거리고 걷다가 책은 포기하고 음반을 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서점을 찾으면서 둘러본 기억을 되감아봤지만 음반매장도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다시 한번 구석구석을 뒤졌습니다. 없더군요.(성균관대 앞에서 작은 가게를 하나 찾긴 했습니다만, 문을 열지 않았더군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핫*랙스라는 종합 선물가게(?)에 음반 코너를 겨우 찾아내 전부는 아니었지만 사려고 했던 앨범 중 하나를 살 수 있었습니다.

오랫만에 찾은 대학로에는 서점도 없고, 음반가게도 없는 뭔가 좀 이상한 느낌의 어딘가였습니다.

아니면, 언젠가부터 필요없어진 것을 굳이 찾아 헤매는 제가 이상해진 것일까요?

2008/12/28 21:01 2008/12/28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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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요즘 의도하지 않게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더군요.

뭐 꼭 연말이라서 이런저런 약속이 잡혔기 때문은 아니었구요.

근 1~2년을 전화로 안부만 묻던 사촌 동생을 결혼 빌미로 만나 술 한잔.

컴퓨터가 고장났을 때를 제외하면 연락 한 통이 없어 내심 서운했던 동생을 길에서 우연히 만나 밥 한끼.

복잡한 심사에 잠도 오지 않고, 냉랭한 방 구석에 혼자 있는 것도 우울해, 가볍게 한잔 하려고 들린 포장마차에서, 남는 자리가 없어 합석을 한 누군가와 합이 맞아 술 두잔.

뭐 그런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뭐 제 성격 탓이겠지만, 누군가를 만나고 나면, 며칠 간은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더군요.

사람을 만나면, 상대방을 만났을 때의 낯설음, 반가움, 긴장, 설레임, 그 사람과의 대화 속에 녹아있는 의미들... 그런 복합적인 이미지들이 사정없이 제 온 몸을 두드려대는 느낌을 받습니다.

물론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워진다는 의미구요. 아주 드물지만, 만난 사람이 생전 처음보는 사람이거나 자리가 불편했을 경우는 실제로 몸이 아프기도 하구요.

그런데 얼마 전, 합석에 합석을 거듭해 대책없이 커진 술자리에서 한 아가씨와 통성명을 하게 됐습니다.

이름이 '사랑해'라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제가 술김이어서 비슷한 발음을 잘못 들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정말 이름이 '사랑해'라더군요. 

뭐 그 사람과의 대화는 그게 전부였습니다. 가열차게 마신 술 덕분에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고, 머리에 남아있는 것이라곤 참 잊기 힘든 그 이름 뿐이지만, 그 만남 이후로 '사랑해'라는 말을 가만히 입 안에서 웅얼거려보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그리고 이 시를 자꾸 찾아보게 됩니다. 정호승 시인의 다른 시와 함께 '사랑'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면 자연스럽게 생각나는 시에요.

그 사람의 이름 덕분에 그리고 시를 읽으면서, 내가 진정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이런게 이상형이라는 것일지도..) 좀 더 차분히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사실 요즘 심적으로 좀 쫓기는 느낌을 받기도 해서 될대로 되겠지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거든요..)

그나저나 싱숭생숭 뒤죽박죽 끓어오른 마음이 가라 앉으려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네요.

당분간 술값 좀 들겠습니다. -_-a

2008/12/22 12:01 2008/12/22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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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hjii2008/12/24 10:40 수정/삭제 댓글주소 댓글달기
    사랑해...

    왠지 낯선 단어...

    {사람을 만나면, 상대방을 만났을 때의 낯설음, 반가움, 긴장, 설레임, 그 사람과의 대화 속에 녹아있는 의미들... 그런 복합적인 이미지들이 사정없이 제 온 몸을 두드려대는 느낌을 받습니다.}

    음....

    나를 만나고도 그러겠군....
    • 당연히 너를 만나고도 그러하지.. 근데 중괄호에 강조해준 그 말은 말야.. 나쁜 뜻만은 아냐..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러




정호승 - 별들은 따뜻하다

별들은 따뜻하다


하늘에는 눈이 있다
두려워할 것은 없다
캄캄한 겨울
눈 내린 보리밭길을 걸어가다가
새벽이 지나지 않고 밤이 올 때
내 가난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나에게
진리의 때는 이미 늦었으나
내가 용서라고 부르던 것들은
모든 거짓이었으나
북풍이 지나간 새벽거리를 걸으며
새벽이 지나지 않고 또 밤이 올 때
내 죽음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묘사(墓祀)를 지내러 내려간 고향 하늘엔 따뜻한 별들이 가득했다.

서울에선 별이 없어서 별자리를 찾기가 힘들었는데, 여기선 별이 너무 많아서 별자리를 찾을 수가 없다.

적막한 달빛 아래 반짝이는 개울가를 걸었고, 달이 구름에 가리기라도 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포근한 어둠 속을 걸었다.

참으로 오랫만에 맛보는 행복한 고독이었다.

2008/11/11 21:29 2008/11/11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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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신 - 눈 내리다 그친 아침

출처 : http://bnwmania.tistory.com

눈 내리다 그친 아침


눈 내리다 그친 아침에 땅강아지 벌써
피어서 거기에 있는 것을 보았다.
(눈이 내리던 중에 피기 시작하였는지)

이 솜털 같은 희망 속에는
작년 가을에 떨어진 낙엽 한장과 꽃잎 하나가 들어있다.

땅속에서 그들은 서로 알고 있었다.
나뭇잎이었던 것들과 꽃잎이었던 것들이
주고 떠난 것을 천천히 이야기하곤 했다.

솜털마다 묻어 있는 울음의 끝.

2008/10/30 17:50 2008/10/30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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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 가재미

가재미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 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얼마 전, 문학과 지성사에서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 시』 라는 책이 나왔다는 것을 알게됐습니다.

음... 정확히 말하면, 문학과 지성사 시인선 중에서 새로 나온게 뭐가 있나? 하고 검색을 하다가 알게됐죠.^^

책 소개 부분을 보니 Q&A 형태로 된 소개글이 있었는데 ...

Q: 최연소 작가는?
A: 문태준.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
.
.

Q: 가장 최근에 발표된 작품은?
A: 문태준.「누가 울고 간다」는 2005년 발표되어 미당문학상을 받았고, 2006년 시집 『가재미』(문학과지성사)에 수록되었다.

1970년 생. 그 어린 나이(물론 더 어린 나이에 시인으로 등단한 사람도 많지만)에 한 시대를 정리하는 문학선집에 자신의 시를 올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신기하고,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당연히 어떤 사람인지, 어떤 시를 쓰는 사람인지 궁금한 마음에 냉큼 사서 읽는 중이구요. 하지만, 아직은 왜 문태준이라는 시인이 문학선집에 실릴만한 시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 시가 좋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너무 맘에 들고 좋은데,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문태준 시인보다 더 젊은 시인 중에도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이 많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 시인들과 문태준 시인 사이의 변별점을 찾기 힘들다는 뜻이지요.

시집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그 이유를 알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

덧 : 아마도 『문학과 지성사에서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 시』을 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책에 실린 시인들을 알게됐으니 그 시인들의 자취를 쫓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008/09/10 13:39 2008/09/10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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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웅이아범2008/09/10 14:02 수정/삭제 댓글주소 댓글달기
    150번째 글을 축하. 축하.
    • 음.. 엎드려 절받는 기분이지만, 어쨌든 고맙네 친구.. 이 글을 남겨주러 여기까지 들어와주다니... 그나저나 니 글이 왜 스팸으로 걸러졌을까? -_-a




파블로 네루다 - 망각은 없다 (정현종 역)

망각은 없다(소나타)


나더러 어디 있었냐고 묻는다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돼서……"라고 말할밖에 없다.
돌들로 어두워진 땅이라든가
살아 흐르느라고 스스로를 망가뜨린 강에 대해 말할밖에;
나는 다만 새들이 잃어 버린 것들에 대해 알고,
우리 뒤에 멀리 있는 바다에 대해, 또는 울고 있는 내 누이에 대해서만 알고 있다.
어찌하여 그렇게 많은 서로 다른 장소들이, 어찌하여 어떤 날이
다른 날에 융합하는 것일까? 어찌하여 검은 밤이
입속에 모이는 것일까? 어째서 이 모든 사람들은 죽었나?

나더러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가진 것들 얘기부터 할밖에 없다.
참 쓰라림도 많은 부엌 세간,
흔히 썩어 버린 동물들,
그리고 내 무거운 영혼 얘기부터.
만나고 엇갈린 게 기억이 아니다,
망각 속에 잠든 노란 비둘기도;
허나 그건 눈물 젖은 얼굴들,
목에 댄 손가락들,
나뭇잎에서 떨어지는 그런 것;
어떤 날의 어두움은 이미 지나가고,
우리들 자신의 음울한 피로 살찐 어떤 날의 어두움도 지나가고.

보라 제비꽃들, 제비들,
우리가 그다지도 사랑하고
시간과 달가움이 어슬렁거리는
마음 쓴 연하장에서 긴 꼬리를 볼 수 있었던 것들.

허나 이빨보다 더 깊이 들어가지는 말고,
침묵을 싸고 자라는 껍질을 잠식하지도 말자,
왜냐하면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니까.
죽은 사람이 참 많고
붉은 태양이 흔히 갈라놓는 바다 제방이 참 많고,
배들이 치는 머리들이 참 많으며,
키스하며 몸을 감는 손들이 참 많고,
내가 잊고 싶은 게 참 많으니까.



외국 시에 대한 제 앎의 정도는 습자지가 형님 할 정도로 얇습니다.
파블로 네루다의 경우도 영화 일포스티노를 통해서 처음 알게됐으니 말 다했죠 ;;;
하지만 굳이 늦게 배운 도둑질에 대한 이야기를 줏어 섬기지 않더라도 저는 이 시인을 무척 좋아합니다.
제게 "외국 시는 우리 시에 비해서 맛이 없다." 라는 편견을 깨준 첫 시인이기도 하구요^^

평소라면 '파업'이나 '시가 내게로 왔다'를 올렸겠지만, 오늘은 왠지 이 시를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누구에게? 세상살이에 힘겨워하는 누군가들에게요. ^^

2008/08/04 11:30 2008/08/04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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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호 - 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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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어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 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2008/07/18 13:32 2008/07/18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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