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 한 마리 - 길상호


일년 넘게 신어온 구두가
입을 벌렸다 소가죽으로 만든
구두 한 마리 음메- 첫울음 울었다
나를 태우고 묵묵히 걷던 일상이
무릎을 꺾고 나자 막혀버리는 길,
풀 한 줌 뜯을 수 없게 씌어놓은
부리망을 풀어주니 구두가
길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돌멩이처럼 굳어버린 기억이
그 입에서 되새김질되고
소화되지 않는 슬픔은 가끔
바닥에 토해놓으면서 구두 한 마리
이승의 삶 지우고 있었다
바닥에서 닳아버린 시간을 따라
다시 걸어야 할 시린 발목,
내가 잡고 부리던 올가미를 놓자
소 한 마리 커다란 눈을 감으며
구두 속에서 살며시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평소에는 한 시인의 시 두편을 함께 올리곤 했었는데, 오늘은 같은 주제, 다른 두 시인의 시를 올려본다. 두 시인 모두 대상을 묘사하는 바느질 솜씨는 정평이 나있는 분들이라 이것도 저것도 그저 감탄이 절로 나올 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소가죽 구두 - 김기택


비에 젖은 구두
뻑뻑하다 발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신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구두는 더 힘껏 가죽을 움츠린다
구두가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린 적은 없었다
나는 구두주걱으로 구두의 아가리를 억지로 벌려
끝내 구두 안에 발을 집어넣고야 만다
내 발이 주둥이를 틀어막자
구두는 벌어진 구두주걱 자국을 조용히 오므린다
소가죽은 제 안에 들어온 발을 힘주어 감싼다
2008/04/03 01:05 2008/04/03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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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 - 멸치

2007/10/04 18:16 / Poem
멸치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이 쉬고 있는 바닷속
지느러미의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남아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갔던 것이다
모래 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집히는 이 멸치에는
두껍고 뻣뻣한 공기를 뚫고 흘러가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이 작은 무늬가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었던 것이다
2007/10/04 18:16 2007/10/04 18:16
Posted by Jackar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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