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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 - 대패삼겹살, 우산을 잃어버리다

대패삼겹살
 
 
대패로 깎아 무얼 만들겠다는 거지?
100% 돼지로 만든 식탁
삼겹살과 핏줄과 신경의 무늬가 생생한 책장과 장롱
숨 쉬는 통돼지로 기둥을 세우고 벽을 만들어
친환경이라는 목조 주택
신문에 끼어 온 전단지에서 본 그 광고들인가?
 
전기톱은 깊은 숲으로 가서
아름드리 라지화이트종 한 마리를 골라 베었겠네
잎과 가지가 다 흔들리도록 비명을 지르다
그루터기만 남기고 돼지는 풀썩 쓰러졌겠네
고소한 비린내가 나무향이 되도록
사방으로 튀던 피와 비명이 무늬목이 되도록
얼마나 오랫동안
대패는 그 돼지를 쓰다듬고 핥으며 길들였을까
 
건강에는 역시 채식이 최고야
성인병도 예방하고 환경도 살리는 웰빙 음식 아닌가
가구나 집이 지겨워지면
미련 없이 부수어 불판 위에 올리게
구워지면서 나무는 비로소 돼지고기가 된다네
참 오래 살고 볼일이구먼
이 생생한 삼겹 나이테살 좀 보게
이토록 완벽한 돼지고기맛 퓨전 채식을 먹게 되리라고
예전에 누가 꿈이라도 꾸어보았겠나


김기택 시인의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천재적인 것 같습니다(물론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이번 시집 역시 실망시키지 않았는데, 시실 이번 시집은 읽기가 좀 힘들긴했습니다.
(시 속에서 묘사되는 죽음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시인의 눈은 여전히 살아있더군요. 비록 그 대상이 죽음일지라도 말입니다.

여기에 옮긴 시는 그 중에서도 좀 가벼운 것들 입니다만...
(시선의 깊이가 얕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오랫만에 좋은 시 몇 편이 아니라 시집 일독을 권하고 싶은 시집입니다.


우산을 잃어버리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우산은 갑자기 난처해졌다.
우산은 제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가
남의 바지를 두어 번 슬쩍 적셨다가
좌석에 잠깐 기댔다가
바닥에 널브러져 구두들에게 밟혔다가
슬픈 눈이 잠시 헛것에 초점을 맞추는 사이
제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 슬며시 없어지고 말았다.
 
버스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던 비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급히 우산을 찾았으나
우산은 제자리에 깊이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당연히 일러버리기 위해 존재한다는 듯이
오래전부터 비가 그치기만 하면 잃어버렸다는 듯이
우산은 민첩하게 제 길을 찾아냈다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는 듯
스스로 찾아낸 제자리를 영영 떠나지 않았다
비가 내렸으므로 나는 다시 우산이 필요했다
비가 더 많이 내렸으므로 잃어버릴 더 많은 것들이 필요해졌다
떨어진 꽃잎들은 껌처럼 바닥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사람들 손에는 하나같이 우산이 들려 있었다.
 
우산들은 어떻게 공기 속에서 비의 냄새를 찾아내어
첫 빗방울이 덜어지자마자 활짝 펴지는 것일까
눈물은 어떻게 슬픔이 지나가는 복잡한 길을 다 읽어 두었다가
슬픔이 터지는 순간 정확하게 흘러내리는 것일까
저 많은 꽃들은 어디에 숨어 있었다가
봄과 나뭇가지에 마련된 자리를 찾아와 한꺼번에 터지는 것일까.
비가 그치면 저 많은 우산들은
어떻게 제 이름이 새겨져 있는 자리를 찾아 일시에 증발해 버리는 것일까.
흙바닥에 뒤엉켜 있는 꽃잎들은
어떻게 한 치의 오차 없이 저 자리를 찾아낸 것일까.
슬픔이 흘러나오던 자리는 어떻게 감쪽같이 명량해지는 것일까.
비가 그치자마자 저 많은 손들은
어떻게 우산을 잃어버린 걸 완벽하게 잊는 것일까.
 
내손에 우산이 없는 걸 보고 비는 더욱 세차게 퍼부었다.
2013/04/30 16:34 2013/04/30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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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스패드와 시집

새로 파견된 사무실의 책상은 유리로 덮혀 있어서 마우스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시간이 좀 남길래 마우스패드를 사러 영풍문구에 갔다가 차마 사지 못하고
(싼건 너무했다 싶고, 쓸만한건 너무 비쌌다)

김기택 시인의 새 시집을 집어왔다.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것보다  비쌌다. 맙소사......)

돌아오는 길 청계천 돌난간에 기대서서 흐르는 물을 보고 있다가 책 앞장을 펼쳐

"오랫만에 들린 영풍에서 마우스패드와 바꾸다. 2013.04.29"

라고 적었다.

마우스패드가 있어야할 자리에는 복합기 매뉴얼을 놓았다.

모든 것이 행복해졌다.



※ 제목이 너무 마음에 안드는데 마땅한게 생각이 안나는게 더 괴롭다. ㅡ.,ㅡ

2013/04/29 22:25 2013/04/29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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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호 - 구두 한 마리, 김기택 - 소가죽 구두

구두 한 마리 - 길상호


일년 넘게 신어온 구두가
입을 벌렸다 소가죽으로 만든
구두 한 마리 음메- 첫울음 울었다
나를 태우고 묵묵히 걷던 일상이
무릎을 꺾고 나자 막혀버리는 길,
풀 한 줌 뜯을 수 없게 씌어놓은
부리망을 풀어주니 구두가
길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돌멩이처럼 굳어버린 기억이
그 입에서 되새김질되고
소화되지 않는 슬픔은 가끔
바닥에 토해놓으면서 구두 한 마리
이승의 삶 지우고 있었다
바닥에서 닳아버린 시간을 따라
다시 걸어야 할 시린 발목,
내가 잡고 부리던 올가미를 놓자
소 한 마리 커다란 눈을 감으며
구두 속에서 살며시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평소에는 한 시인의 시 두편을 함께 올리곤 했었는데, 오늘은 같은 주제, 다른 두 시인의 시를 올려본다. 두 시인 모두 대상을 묘사하는 바느질 솜씨는 정평이 나있는 분들이라 이것도 저것도 그저 감탄이 절로 나올 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소가죽 구두 - 김기택


비에 젖은 구두
뻑뻑하다 발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신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구두는 더 힘껏 가죽을 움츠린다
구두가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린 적은 없었다
나는 구두주걱으로 구두의 아가리를 억지로 벌려
끝내 구두 안에 발을 집어넣고야 만다
내 발이 주둥이를 틀어막자
구두는 벌어진 구두주걱 자국을 조용히 오므린다
소가죽은 제 안에 들어온 발을 힘주어 감싼다
2008/04/03 01:05 2008/04/03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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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 - 멸치

멸치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이 쉬고 있는 바닷속
지느러미의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남아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갔던 것이다
모래 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집히는 이 멸치에는
두껍고 뻣뻣한 공기를 뚫고 흘러가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이 작은 무늬가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었던 것이다
2007/10/04 18:16 2007/10/04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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