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차애 - 감렬하다

감렬하다*


시간으로 따지면 개와 늑대의 시간언저리다
노곤한 단맛으로 풀리는가 싶다가 뜨겁고 묵직하게 치받는 맛
너무 환하지도 너무 깜깜하지도 않은 짜르르한 술 맛
가라사대, 감렬한 맛!

목숨처럼 간절한 순간이 있다
주술보다 모호한 향이 있다
차마 지나칠 수 없어서 움켜잡는 입구가 있다
<신가요록> <수운잡방> <고사촬요> <주찬>........**
오글오글한 문자향이 누룩빛 길 쪽으로 자욱하다

찌고 식히고 말리고 담그고....... 이윽고....... 거르고
‘이윽고’의 시간들이 글썽글썽 씨방처럼 부풀어 오른다
눈물이 발효되는 과정과 비슷하다
품은 한 사람이 한 생으로 전도될 때쯤에라야
마음의 내력은 푹푹 삭아서 서늘하게 끓어오른다.

정월 술은 신맛이 강하고
꽃철 봄 술은 단맛이 피어오르는데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돌아가지도 나아가지도 못하는
개와 늑대의 시간!
생의 진퇴양난이 서로 밀고 밀리며 속 끓여낸 맛,
감렬하다!


술을 마시고, 담그고, 그 속에 삶을 담아 이야기하는 하나의 흐름이 매끈하다.
시의 제목처럼 감렬하게 내 등줄기를 훑어내린다.
한편의 시에 취해서 나도 내 삶도 조용히 흔들린다.


옮겨 적은이의 각주

* "감렬하다"는 달고 시원하다는 뜻이지만, 술을 빚을 때는 "달면서 알코올 도수가 좀 있다"는 뜻으로 쓰인다고 합니다.

** 신가요록과 수운잡방은 모두 옛 요리책이며 당연하게도 술 담그는 법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고사촬요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고, 주찬은 술과 안주를 뜻합니다. 수운잡방의 한 챕터이기도 합니다만, "주찬"이라는 책이 따로 존재하는지는 모르겠네요.
2014/01/03 11:20 2014/01/03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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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종 -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시가 주는 감동? 느낌? 울림? 과는 별개로 우두커니처럼이라는 저 한 줄이 가슴을 두드리곤 합니다.

시적 허용을 저렇게 담백하고 강렬하게 쓸 수 있다면, 제가 긁적거리는 것들도 조금은 읽어줄만한 그 무엇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2013/11/25 11:03 2013/11/25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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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 - 대패삼겹살, 우산을 잃어버리다

대패삼겹살
 
 
대패로 깎아 무얼 만들겠다는 거지?
100% 돼지로 만든 식탁
삼겹살과 핏줄과 신경의 무늬가 생생한 책장과 장롱
숨 쉬는 통돼지로 기둥을 세우고 벽을 만들어
친환경이라는 목조 주택
신문에 끼어 온 전단지에서 본 그 광고들인가?
 
전기톱은 깊은 숲으로 가서
아름드리 라지화이트종 한 마리를 골라 베었겠네
잎과 가지가 다 흔들리도록 비명을 지르다
그루터기만 남기고 돼지는 풀썩 쓰러졌겠네
고소한 비린내가 나무향이 되도록
사방으로 튀던 피와 비명이 무늬목이 되도록
얼마나 오랫동안
대패는 그 돼지를 쓰다듬고 핥으며 길들였을까
 
건강에는 역시 채식이 최고야
성인병도 예방하고 환경도 살리는 웰빙 음식 아닌가
가구나 집이 지겨워지면
미련 없이 부수어 불판 위에 올리게
구워지면서 나무는 비로소 돼지고기가 된다네
참 오래 살고 볼일이구먼
이 생생한 삼겹 나이테살 좀 보게
이토록 완벽한 돼지고기맛 퓨전 채식을 먹게 되리라고
예전에 누가 꿈이라도 꾸어보았겠나


김기택 시인의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천재적인 것 같습니다(물론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이번 시집 역시 실망시키지 않았는데, 시실 이번 시집은 읽기가 좀 힘들긴했습니다.
(시 속에서 묘사되는 죽음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시인의 눈은 여전히 살아있더군요. 비록 그 대상이 죽음일지라도 말입니다.

여기에 옮긴 시는 그 중에서도 좀 가벼운 것들 입니다만...
(시선의 깊이가 얕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오랫만에 좋은 시 몇 편이 아니라 시집 일독을 권하고 싶은 시집입니다.


우산을 잃어버리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우산은 갑자기 난처해졌다.
우산은 제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가
남의 바지를 두어 번 슬쩍 적셨다가
좌석에 잠깐 기댔다가
바닥에 널브러져 구두들에게 밟혔다가
슬픈 눈이 잠시 헛것에 초점을 맞추는 사이
제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 슬며시 없어지고 말았다.
 
버스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던 비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급히 우산을 찾았으나
우산은 제자리에 깊이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당연히 일러버리기 위해 존재한다는 듯이
오래전부터 비가 그치기만 하면 잃어버렸다는 듯이
우산은 민첩하게 제 길을 찾아냈다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는 듯
스스로 찾아낸 제자리를 영영 떠나지 않았다
비가 내렸으므로 나는 다시 우산이 필요했다
비가 더 많이 내렸으므로 잃어버릴 더 많은 것들이 필요해졌다
떨어진 꽃잎들은 껌처럼 바닥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사람들 손에는 하나같이 우산이 들려 있었다.
 
우산들은 어떻게 공기 속에서 비의 냄새를 찾아내어
첫 빗방울이 덜어지자마자 활짝 펴지는 것일까
눈물은 어떻게 슬픔이 지나가는 복잡한 길을 다 읽어 두었다가
슬픔이 터지는 순간 정확하게 흘러내리는 것일까
저 많은 꽃들은 어디에 숨어 있었다가
봄과 나뭇가지에 마련된 자리를 찾아와 한꺼번에 터지는 것일까.
비가 그치면 저 많은 우산들은
어떻게 제 이름이 새겨져 있는 자리를 찾아 일시에 증발해 버리는 것일까.
흙바닥에 뒤엉켜 있는 꽃잎들은
어떻게 한 치의 오차 없이 저 자리를 찾아낸 것일까.
슬픔이 흘러나오던 자리는 어떻게 감쪽같이 명량해지는 것일까.
비가 그치자마자 저 많은 손들은
어떻게 우산을 잃어버린 걸 완벽하게 잊는 것일까.
 
내손에 우산이 없는 걸 보고 비는 더욱 세차게 퍼부었다.
2013/04/30 16:34 2013/04/30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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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트란스트레(뢰)메르 - 기억이 나를 본다

기억이 나를 본다


유월의 어느 아침, 일어나기엔 너무 이르고
다시 잠들기엔 너무 늦은 때.

밖에 나가야겠다. 녹음이
기억으로 무성하다. 눈 뜨고 나를 따라오는 기억.

보이지 않고, 완전히 배경 속으로
녹아드는, 완벽한 카멜레온.

새 소리가 귀먹게 할 지경이지만,
너무나 가까이 있는 기억의 숨소리가 들린다.


어제 밤(10월 6일) 스웨덴의 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레(뢰)메르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들어본 적이 없는 시인, 읽어본 적이 없는 시.

하지만 세계는 그를 인정했다.

우리 나라에 출판된 책은 한 권 뿐인데, 그나마도 절판이고...

지금이야 한 편의 시뿐이지만, 앞으로 계속 찾아 볼 생각이다.

외국 시도 가슴을 울릴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준 것이 파블로 네루다였다.

이번 기회가 또 한번 외국 시(시인)에 대한 내 편견을 깰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2011/10/07 09:31 2011/10/07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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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아지경┃2012/04/20 15:12 삭제
    참 신기하지...생각을 계속하면 정리가 되고 그것을 글로 옮기면 힘이 붙지...그래서 글로 옮기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결심과 계획을 전달하는 건 아주 중요하지...2012년 새해를 맞아 어떤 것들을




최춘희 - 나무늘보처럼

나무늘보처럼


한 백년 쯤
여기서 잠들고 싶어

당신도 나를 깨우지 마
달콤한 이 순간을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아

지나간 시간들
천천히 되새김질 하며
눈 감은 채
이렇게

나무 위에서
한 마리 작은 짐승으로
순하게 눈 뜰 때까지
이대로 내버려 둬

세상의 모든 시름 다 잊은 채
느릿느릿
유유자적
한없이 행복하겠지


친구가 저에게 동물로 다시 태어난다면 무슨 동물이 되고 싶으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제 대답은 "나무늘보" 였습니다. 그 때, 마치 못볼 것을 봤다는 듯, 혹은 신기한 무언가를 쳐다보는 듯한 그 친구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네요. 아니 잊을 수가 없다기 보다는 오늘 아침 이 시를 읽다가 오랫만에 그 친구를 떠올리게 됐다는게 맞겠네요.

하지만 지금은 애완용으로 나무늘보를 키우는 사람도 꽤 되고, 나무늘보가 되고 싶은 사람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가 되었습니다.(정말? ...-_-)

나무늘보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주말에 집에서 나무늘보 놀이를 하는 걸로는 갈증이 가시질 않네요.

느리게 한없이 느리게 살고 싶습니다.
2011/09/30 10:44 2011/09/30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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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혜숙 - 무화과 / 선인장

무화과


누군들 남모르게 피워본 꽃 한 송이 없으랴.
마음의 주머니 속에 숨겨두고
여름내 혼자 키워 놓은 아름다운 비밀 하나


남혜숙 시인의 시를 읽으면 언제나 참 대단하다는 생각부터 듭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너무 강한 탓에 칼날도 아프다*를 읽은 후에 여우야 여우야**를 아직 못보고 있어요. 심지어 칼날도 아프다를 읽을 당시에 이미 여우야 여우야가 출판된 - 구매한 -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한 사람을 사랑하려면 그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스스로가 맘에 들지 않는군요. 아마도 제가 아직까지 옆에 사람을 두지 못하는건 그런 성격 탓이 아닌가 싶네요.
기분 좋게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급 우울... ㅠㅠ


선인장


단단한 몸 날카로운 가시
거짓말이다

넓은 잎에 화려한 꽃
거짓말이다

모른다
저 몸속 가득찬 끈끈한 눈물



*  남혜숙 시인의 첫번째 시집 2001년 문학세계현대시선집-178
** 남혜숙 시인의 두번째 시집 2009년 지혜사랑 시인선-27
2011/05/09 11:42 2011/05/09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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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 그녀의 염전

그녀의 염전


  첫눈 내린 어제 저녁 세탁소집 여자가 우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자주 운다 차양 밑에 빼곡하게걸린 옷들 밑에서거나 옆집 애완센터 토끼장 앞에서거나
 
  다른 몸들을 덮어주었을 옷 밑에서  울 땐 조금만 운다 울다가는 긴 장대로 아무 옷이나  꺼내 흔들어 보곤 한다 옷들은 위험하게 흔들리고 그녀는 이내 눈물을 그친다
 
  토끼장 앞에 쭈그려 앉아서 울 땐 오래 운다 빨간 플라스틱 바가지를 들고 앉아 오래도록 칫솔질을 하며 운다 토끼장 속 눈 붉은 토끼가 그녀를 먼저 외면할 때까지

  그런 저녁이 있은 다음날 아침이면  나는 그녀의 염전 앞을 가만가만 지난다 다리미 손잡이를 꽉 잡은  오른손 위에 말뚝처럼 포개어진 왼손. 어깨를 들어올리며 그녀는 다림판 위로 온 힘을 모은다
 
  기도하는 제 손을 내려다보는 황량하게 뚫린 두 개의 검은 염전. 당분간은 그녀도 수차를 젓지 않을 것이다


......

2010/10/19 21:43 2010/10/19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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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 악어를 위하여

악어를 위하여


자 덤빌 테면 덤벼봐
악어는 정글 속 가장 깊은 곳에서
이를 갈며 기다리고 있다
복병처럼 숨어서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세상이여
나의 납작해진 뒤통수를 보아라

질척질척한 늪, 진흙 속을 뒹굴며 헤엄치다
가끔 열려 있는 하늘 위로 홀로 비상하는 것들을 보면
악어는 입을 쩍 벌린다
단 한 입에 끝내주겠다는 듯이

이 정글의 어떤 사내도
그놈을 길들일 순 없지
어느 새벽녘, 여린 풀잎의 꿈들이
놈의 슬픔을 어루만질 때
진흙 밑에 숨겨오던 희고 부드러운 배를
슬쩍 드러내겠지만

정오의 햇살 사이로 숲이 뜨거운 입김을 뿜어내는 계절
몇 발의 총성이 울리는 어느 날
사냥꾼들은 맥주로 검은 수염 적시며
승리의 모닥불을 피우는 그 순간에도
그 이름을 두렵게 불러볼 것이다

악명 높은 동물이여
죽어서 고급 피혁 제품으로 변신한 뒤에도
복종하지 않는 자의 최후가 갖는 비장미를 자랑하며
번쩍이는 그 이름. 으, 악, 어


요즘 책을 거의 읽지 못했습니다.

자꾸 읽어서 채워도 어느 순간 바닥을 드러내버리는 얄팍한 감성의 소유자이면서도 노력하지 않았으니 글을 올릴 수 있을리가 없다고 생각을... 반성을...

그래도 계속 놔두면 빈 집 같아 보일까봐 걱정스러워 시 한편 올립니다.

진은영 시인의 시는 이미지가 강하게 남는 편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시인의 시를 읽다가 다른 글을 읽으면, 왠지 싱거운 느낌을 떨쳐버리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계속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때는 저도 "누구든 걸리기만 해봐라 꽉 물어줄테다!!!"라고 다짐하면서 세상을 살았던 시절도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 마음마저 닳고 닳았는지 아무 생각없이 그저 제 얼굴처럼 둥글둥글 사는게 목표가 되고 말았네요.

날도 덥고, 일도 힘드니 오랫만에 마음 속에 옹이 하나 새겨넣고, 키워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네요.

여러모로 당분간 좀 독해져볼까 합니다. ^^

2010/08/13 19:31 2010/08/13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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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 갇힌 사람, 70년대산(産)

갇힌 사람
  - 기형도에게


그는 내 안에 갇혔다
그리고 슬픔은 그의 안에 갇혔다
그는 예전과 달리 여유가 조금 생겼다. 공원의 좁은 나뭇잎들
아래로 천천히 걷다가 사다리로 올라가
하늘을 뜯어버렸다, 구멍을 막아놓은 판자처럼
빗방울
혹은 별과 검은 빛이 쏟아질 테고
너는 바라볼 것이다,
라고 그는 생각할 테지만

나는 여전히 분주했다. 뜯지 않은 서류가
쌓여있고 오후의 햇빛은 빛났다
그가 가는 곳을 신경 쓸 겨울조차 없었다, 그러므로
무엇인가 흘러나와 먼지투성이
푸른 종이를 적셨지만 내 탓은 아니다
그런 저녁이면 참
이상하기도 하지, 돌계단에 앉은
그의 곁에서 늙은 개가 축축한 밤의 뺨을 핥는 것이다
달이 조각칼로
지나가는 날들과 죽은 나무들의 껍질을 벗긴다
환하게, 문득
은빛 기둥이 드러난다

아 그렇군, 아주 오래 전
나는 어둡고 부드러운 세월과 결혼한 적이 있다
자두나무 두 그루 사이에 걸린
희미한 기타소리 같은 얼굴
그 세월이 데려온 슬픔의 의붓자식
모든 청춘이 살해된 뒤에도 살아남을
비명의 공증인, 그는
내 안에 갇혔다


쉽게 읽히고 이해된다고 해서 쉬운 시가 아니고, 어렵게 느껴지고 뜻을 알 수 없다고 해서 어려운 시가 아닌 것처럼 진은영 시인의 시는 제게 언제나 어려운 시였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읽으면 가슴 한 구석이 아릿해지는 그런 시'를 찾으면 전 언제나 진은영 시인의 시를 건내주곤 했습니다.

오랫만에 다시 잡은 시인의 시집은 여전히 묵직하고, 아프게 제 가슴을 울리는군요.

이번 주말엔 비가 좀 왔으면 좋겠고, 뜨거운 커피가 그리울만큼 서늘했으면 좋겠고, 그 누구도 그립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70년대산(産)


우리는 목숨을 걸고 쓴다지만
우리에게
아무도 총을 겨누지 않는다
그것이 비극이다
세상을 허리 위 분홍 훌라후프처럼 돌리면서
밥 먹고
술 마시고
내내 기다리다
결국
서로 쏘았다

2010/06/24 13:25 2010/06/24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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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 봄날

봄날


아흔의 어머니와 일흔의 딸이
늙은 소나무 아래서
빈대떡을 굽고 소주를 판다
잔을 들면 소주보다 먼저
벚꽃잎이 날아와 앉고
저녁놀 비낀 냇물에서 처녀들
벌겋게 단 봄을 식히고 있다
벚꽃무더기를 비집으며
늙은 소나무 가지 사이로
하얀 달이 뜨고
아흔의 어머니와 일흔의 딸이
빈대떡을 굽고 소주를 파는
삶의 마지막 고샅
북한산 어귀
온 산에 풋내 가득한 봄날
처녀들 웃음소리 가득한 봄날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지금쯤 용화산의 허리를 밟고 있거나 이미 내려와 막걸리를 한 잔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산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등산화를 마련해 놓고도 사실 그다지 자주 찾는 편은 아니지만, 이런 날이라면 한번쯤 걸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마음이 맞는 누군가와 함께라면 좋겠고, 그 사람과 흐르는 땀을 식히면서 벚꽃 잎이 춤을 추는 막걸리 잔을 부딪힌다면 더 없이 좋겠다.

2010/05/01 12:00 2010/05/0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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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ia2010/05/05 02:56 수정/삭제 댓글주소 댓글달기
    좋으네... 온 산에 풋내 가득한 봄날...
    날이 더워 봄이 봄인가 싶다가도 연둣빛 새잎들 보면...
    봄은 봄이네, 해.
    봄은 봄이고, 유~영종이씨는 유~영종이씨고, 나는 나고
    :) 나야~
    • 날은 목이 미어지도록 좋은데, 내가 있는 곳은 밖으로 뚫린 창문이 없어.. 언제나 어두침침한 지하실 분위기가 나.

      좀 전에 점심먹고 들어오는데, 차마 발걸음이 안떨어지더군.. 일을 얼른 끝내고 자전거라도 한판 타야겠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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