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 - 샴푸의 요정

시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1) -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이라는 길고도 왠지 묵직해보이는 책에 올라간 시들이 어떤 것들인가 살펴보다가 문득 '장정일'이라는 이름에 시선이 멈췄습니다.

'많은 시 중에서 어떤 시가 올라갔을까?'하고 살펴보니 '샴푸의 요정'이라는 시가 있네요.

'음..? 샴푸의 요정? 빛과 소금의 노래 제목하고 똑같네? 혹시???'

찾아보니 역시나 이 시가 노래로 옮겨진 것 같습니다. 장정일 시인하면 몇몇 소설들이 이미 영화화 됐고, 시 중에서도 '요리사와 단식가'라는 시가 '301, 302'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된 것은 알고 있었지만, 노래로 만들어졌다는 건 몰랐네요.

마침 점심시간이라 시간도 있고 해서, 서둘러 노래를 수배해 놓고, 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샴푸의 요정


사내는 추리극장이 싫다. 국내 소식이
싫고 운동경기가 싫고 문제의 외화가
싫다. 안 본다. 그리고 방송출연하는
많은 다른 여인들이 역겹다. 나는 그녀만을 본다.
여덟 시 반의 그녀를 기다린다. 보시겠읍니까
15초 동안 그녀는 샴푸회사를 위해
광고하지요. 보시겠읍니까

그녀는 인사를 잘한다. 안녕하셔요
그녀는 미소띠며 속삭인다
파란 물방울 무늬 잠옷을 입고
그녀는 머리를 감아 보인다. 무지개를 실은
동글동글한 거품이 티브이 화면을 완전히
메운다. 그러면 샴푸의 요정이 속삭이는 거지
새로 나온 샴푸, 당신이 결정한 샴푸라고
향기가 좋은 샴푸, 세계인이 함께 쓰는 샴푸
아마 당신은 사랑에 빠질 거예요
라고 속삭이는 것이지

미용주식회사가 있다. 아시아 굴지의
미용주식회사가 있다. 그리고
우리들에겐 요정이 있다. 현존하는 유일한 요정
매일 저녁 여덟 시 반, 티브이 화면을 찢으며
우리 곁에 날아오는 샴푸의 요정. 그녀는 15
초 동안 지껄이고
캄캄한 화면 뒤로 사라진다. 여덟 시 반.
매일 저녁 여덟 시 반에는 그녀가
출연하는 광고가 있다. 기다려 주세요

광고가 끝나면 사내는 무기력하게
티브이를 꺼 버린다. 매일 저녁 15초가 필요할 뿐
사내는 사진을 들여다본다. 짝사랑하는
그녀 사진을 사내는 모은다. 방에 붙이기도 한다
흰 이를 드러내고 웃는 모습. 수영복을 입은 모습
승마복을 멋지게 입은 사진을 그는 모은다.
그리고 칼에 대어 잘라낸다. 샴푸의 요정이
어느 영화에 출연해서 보여주는
곧 입술이 닿으려는 찰나의 남자 배우 입술을
면도날로 잘라낸다.

선전문안이 들끓는 밤 열 한 시
나지막이 샴푸의 요정이 속삭이지 않는가
그녀의 노래가 귓전에 맴돌지 않는가.
쓰세요, 쓰세요, 사랑의 향기를
느껴 보세요. 그리고 그녀의 약속이
가슴속에 고동치지 않는가. 오늘 밤
당신을 찾아가겠어요, 광고 속에서
그녀는 약속했었지. 욕망이 들끓는 사내의 머리통

옷을 벗는 요정. 담배불 자국이 송송한 소파에
비스듬이 눕는 요정. 신비스레 신비스레
가라앉는 요정. 뜨거운 입술로
이리 오세요 예쁜 아기, 속살거리는 요정
환영이 들끓는 밤 열 두 시, 이윽고 샴푸의 요정은
그의 머리를 끌어당겨
냄새를 맡아 본다. 제가 권한 것을 쓰셨겠지요
물론 그러하셨겠지요?

0시 삼십 분. 사내는 샴푸가 아닌
다른 이야기가 하고 싶다. 무언가
시도하고 싶다. 그러나 그녀는 실내화를 끌며
얼마나 잽싸게 달아나는가. 참 잘하셨어요
샴푸는 역시 우리 것이 최고랍니다. 계속
애용해 주세요. 분홍빛 잠옷을 끌며
샴푸의 요정은 사라진다. 아아
좀더 있어 주세요! 좀더!

꿈에서 깨어나
사내는 타자기를 두드려댄다.
딱딱딱딱딱
굴지의 미용주식회사가 있다.
그리고 현존하는 유일한 요정은
샴푸요정이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장정일스럽다고 해야할까? 거침없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됐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최근 1년 사이 제가 벌이고 있는 일련의 행태들이 대상만 조금 다를 뿐 시 속의 사내처럼(시 속에서도 사내는 '나'가 되었다가 다시 '우리'가 되기도 합니다.) 정신적 수음에 헐떡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힘드네요.

시를 읽다가 시를 통해서 제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보게 된 것인지, 그저 괜한 생각을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나오네요.

그 문제는 우선 접어두고, 그저 문득 드는 생각은 장정일 시인의 시를 읽은지가 참 오래됐다는 겁니다.(사실 이런 느낌이 싫어서 의도적으로 피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퇴근길에 한 권쯤 사서 오랫만에 머리 구석구석을 난도질 당해보는 것도 꽤나 이 겨울에 어울리는 일이 아닌가 싶네요.

2009/01/07 15:56 2009/01/07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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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 百年

百年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빈 의자처럼 쓸쓸히 술을 마셨네

내가 그대에게 하는 말은 다 건네지 못한 후략의 말

그제는 하얀 앵두꽃이 와 내 곁에서 지고
오늘은 왕버들이 한 이랑 한 이랑의 새잎을 들고 푸르게 공중을 흔들어 보였네

단골 술집에 와 오늘 우연히 시렁에 쌓인 베개들을 올려보았네
연지처럼 붉은 실로 꼼꼼하게 바느질해놓은 百年아리는 글씨

저 百年을 함께 베고 살다 간 사랑은 누구였을까
병이 오고, 끙끙 앓고, 붉은 알몸으로도 뜨겁게 껴안자던 百年

등을 대고 나란히 눕던, 당신의 등을 쓰다듬던 그 百年이라는 말
강물처럼 누워 서로서로 흘러가자던 百年이라는 말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하루를 울었네


오늘 약속이 있어 대학로에 갔습니다. 그 전에 살 책과 CD가 있어 영풍문고에 들렀지요.

한 권은 찾았는데, 한 권은 없다고 하고, 예전에 있었던 CD 매장은 없어졌더군요. 근처 교보나 반디앤루니스에 갈까 했습니다만, 어차피 종로에서 대학로까지 슬슬 걸어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가다 보면 나오겠지 하고는 걷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걸어 대학로에 도착해서는 약속 장소를 한번 둘러보고는 바로 서점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마로니에 공원부터 성균관 대학교 앞까지 골목 골목을 뒤졌습니다만, 어찌된 일인지 서점이 보이질 않습니다.

한시간 가량을 터벅거리고 걷다가 책은 포기하고 음반을 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서점을 찾으면서 둘러본 기억을 되감아봤지만 음반매장도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다시 한번 구석구석을 뒤졌습니다. 없더군요.(성균관대 앞에서 작은 가게를 하나 찾긴 했습니다만, 문을 열지 않았더군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핫*랙스라는 종합 선물가게(?)에 음반 코너를 겨우 찾아내 전부는 아니었지만 사려고 했던 앨범 중 하나를 살 수 있었습니다.

오랫만에 찾은 대학로에는 서점도 없고, 음반가게도 없는 뭔가 좀 이상한 느낌의 어딘가였습니다.

아니면, 언젠가부터 필요없어진 것을 굳이 찾아 헤매는 제가 이상해진 것일까요?

2008/12/28 21:01 2008/12/28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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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요즘 의도하지 않게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더군요.

뭐 꼭 연말이라서 이런저런 약속이 잡혔기 때문은 아니었구요.

근 1~2년을 전화로 안부만 묻던 사촌 동생을 결혼 빌미로 만나 술 한잔.

컴퓨터가 고장났을 때를 제외하면 연락 한 통이 없어 내심 서운했던 동생을 길에서 우연히 만나 밥 한끼.

복잡한 심사에 잠도 오지 않고, 냉랭한 방 구석에 혼자 있는 것도 우울해, 가볍게 한잔 하려고 들린 포장마차에서, 남는 자리가 없어 합석을 한 누군가와 합이 맞아 술 두잔.

뭐 그런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뭐 제 성격 탓이겠지만, 누군가를 만나고 나면, 며칠 간은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더군요.

사람을 만나면, 상대방을 만났을 때의 낯설음, 반가움, 긴장, 설레임, 그 사람과의 대화 속에 녹아있는 의미들... 그런 복합적인 이미지들이 사정없이 제 온 몸을 두드려대는 느낌을 받습니다.

물론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워진다는 의미구요. 아주 드물지만, 만난 사람이 생전 처음보는 사람이거나 자리가 불편했을 경우는 실제로 몸이 아프기도 하구요.

그런데 얼마 전, 합석에 합석을 거듭해 대책없이 커진 술자리에서 한 아가씨와 통성명을 하게 됐습니다.

이름이 '사랑해'라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제가 술김이어서 비슷한 발음을 잘못 들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정말 이름이 '사랑해'라더군요. 

뭐 그 사람과의 대화는 그게 전부였습니다. 가열차게 마신 술 덕분에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고, 머리에 남아있는 것이라곤 참 잊기 힘든 그 이름 뿐이지만, 그 만남 이후로 '사랑해'라는 말을 가만히 입 안에서 웅얼거려보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그리고 이 시를 자꾸 찾아보게 됩니다. 정호승 시인의 다른 시와 함께 '사랑'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면 자연스럽게 생각나는 시에요.

그 사람의 이름 덕분에 그리고 시를 읽으면서, 내가 진정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이런게 이상형이라는 것일지도..) 좀 더 차분히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사실 요즘 심적으로 좀 쫓기는 느낌을 받기도 해서 될대로 되겠지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거든요..)

그나저나 싱숭생숭 뒤죽박죽 끓어오른 마음이 가라 앉으려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네요.

당분간 술값 좀 들겠습니다. -_-a

2008/12/22 12:01 2008/12/22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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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hjii2008/12/24 10:40 수정/삭제 댓글주소 댓글달기
    사랑해...

    왠지 낯선 단어...

    {사람을 만나면, 상대방을 만났을 때의 낯설음, 반가움, 긴장, 설레임, 그 사람과의 대화 속에 녹아있는 의미들... 그런 복합적인 이미지들이 사정없이 제 온 몸을 두드려대는 느낌을 받습니다.}

    음....

    나를 만나고도 그러겠군....
    • 당연히 너를 만나고도 그러하지.. 근데 중괄호에 강조해준 그 말은 말야.. 나쁜 뜻만은 아냐..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러




정호승 - 별들은 따뜻하다

별들은 따뜻하다


하늘에는 눈이 있다
두려워할 것은 없다
캄캄한 겨울
눈 내린 보리밭길을 걸어가다가
새벽이 지나지 않고 밤이 올 때
내 가난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나에게
진리의 때는 이미 늦었으나
내가 용서라고 부르던 것들은
모든 거짓이었으나
북풍이 지나간 새벽거리를 걸으며
새벽이 지나지 않고 또 밤이 올 때
내 죽음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묘사(墓祀)를 지내러 내려간 고향 하늘엔 따뜻한 별들이 가득했다.

서울에선 별이 없어서 별자리를 찾기가 힘들었는데, 여기선 별이 너무 많아서 별자리를 찾을 수가 없다.

적막한 달빛 아래 반짝이는 개울가를 걸었고, 달이 구름에 가리기라도 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포근한 어둠 속을 걸었다.

참으로 오랫만에 맛보는 행복한 고독이었다.

2008/11/11 21:29 2008/11/11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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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신 - 눈 내리다 그친 아침

출처 : http://bnwmania.tistory.com

눈 내리다 그친 아침


눈 내리다 그친 아침에 땅강아지 벌써
피어서 거기에 있는 것을 보았다.
(눈이 내리던 중에 피기 시작하였는지)

이 솜털 같은 희망 속에는
작년 가을에 떨어진 낙엽 한장과 꽃잎 하나가 들어있다.

땅속에서 그들은 서로 알고 있었다.
나뭇잎이었던 것들과 꽃잎이었던 것들이
주고 떠난 것을 천천히 이야기하곤 했다.

솜털마다 묻어 있는 울음의 끝.

2008/10/30 17:50 2008/10/30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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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네루다 - 망각은 없다 (정현종 역)

망각은 없다(소나타)


나더러 어디 있었냐고 묻는다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돼서……"라고 말할밖에 없다.
돌들로 어두워진 땅이라든가
살아 흐르느라고 스스로를 망가뜨린 강에 대해 말할밖에;
나는 다만 새들이 잃어 버린 것들에 대해 알고,
우리 뒤에 멀리 있는 바다에 대해, 또는 울고 있는 내 누이에 대해서만 알고 있다.
어찌하여 그렇게 많은 서로 다른 장소들이, 어찌하여 어떤 날이
다른 날에 융합하는 것일까? 어찌하여 검은 밤이
입속에 모이는 것일까? 어째서 이 모든 사람들은 죽었나?

나더러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가진 것들 얘기부터 할밖에 없다.
참 쓰라림도 많은 부엌 세간,
흔히 썩어 버린 동물들,
그리고 내 무거운 영혼 얘기부터.
만나고 엇갈린 게 기억이 아니다,
망각 속에 잠든 노란 비둘기도;
허나 그건 눈물 젖은 얼굴들,
목에 댄 손가락들,
나뭇잎에서 떨어지는 그런 것;
어떤 날의 어두움은 이미 지나가고,
우리들 자신의 음울한 피로 살찐 어떤 날의 어두움도 지나가고.

보라 제비꽃들, 제비들,
우리가 그다지도 사랑하고
시간과 달가움이 어슬렁거리는
마음 쓴 연하장에서 긴 꼬리를 볼 수 있었던 것들.

허나 이빨보다 더 깊이 들어가지는 말고,
침묵을 싸고 자라는 껍질을 잠식하지도 말자,
왜냐하면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니까.
죽은 사람이 참 많고
붉은 태양이 흔히 갈라놓는 바다 제방이 참 많고,
배들이 치는 머리들이 참 많으며,
키스하며 몸을 감는 손들이 참 많고,
내가 잊고 싶은 게 참 많으니까.



외국 시에 대한 제 앎의 정도는 습자지가 형님 할 정도로 얇습니다.
파블로 네루다의 경우도 영화 일포스티노를 통해서 처음 알게됐으니 말 다했죠 ;;;
하지만 굳이 늦게 배운 도둑질에 대한 이야기를 줏어 섬기지 않더라도 저는 이 시인을 무척 좋아합니다.
제게 "외국 시는 우리 시에 비해서 맛이 없다." 라는 편견을 깨준 첫 시인이기도 하구요^^

평소라면 '파업'이나 '시가 내게로 왔다'를 올렸겠지만, 오늘은 왠지 이 시를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누구에게? 세상살이에 힘겨워하는 누군가들에게요. ^^

2008/08/04 11:30 2008/08/04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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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용 - 남으로 창을 내겠소

남으로 창을 내겠소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지난 포스팅에 이어 날씨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제가 활동(?)하고 있는 카페 모임이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곳 게시판에 어떤 분이 "요즘 날씨 정말 짜증나 미치겠다"는 요지의 글을 올리셨더군요.

글의 요지는 '비는 찔끔꺼리면서 오다말다 하고, 그렇다고 맑지도 않고, 덥기는 오지게 더우니 날씨가 왜 이모양이냐?' 정도로 요약이 되더군요.

그런데 그 글을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음?? 난 왜 아무렇지도 않지?? 왜 요즘 날씨에 대해 아무 불만이 없을까? 아니 아예 좋거나 싫거나 하는 생각 자체가 없었군...'

물론 저도 날씨에 대해 악감정을 품을 때가 있습니다. 여행을 계획 했거나, 자전거를 탈 수 없는 상황이 되거나, 우산이 없이 폭우에 노출 됐을때...

하지만 위의 세 경우를 제외하면, 맑은 날은 맑아서 좋고, 비가 오는 날은 비가 와서 좋고, 흐린 날은 흐려서 좋고, 변덕스러운 날은 변덕스러워서 좋은 ...... 말하자면 그냥 다 좋은 ;;;;;;

이런 생각들은 아마 제가 평소 세상을 보는 혹은 살아가는 방식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좋게 얘기하면, 긍정적 사고방식인거고, 나쁘게 얘기하면 줏대 없이 사는 걸텐데....

어떤 일을 하든 최상의 경우와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 놓고 일을 진행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하는 상황이면 전 언제나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합니다.

말에도 힘이 있고, 좋게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므로써 모든 일이 조금은 좋은 방향으로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거든요.(물론 말만 한다고 해서 모든 일이 잘 될꺼라고 생각하는건 아닙니다.)

사실 스트레스도 좀 덜 받는 것 같구요. ;;;;

좋은게 좋은거 아니겠습니까? 얼씨구!!!!!

왜 그따위로 사냐고 묻는다면.. 웃을 수 밖에요.  ^__^

2008/08/01 15:57 2008/08/01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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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호 - 북어

사용자 삽입 이미지

북어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 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2008/07/18 13:32 2008/07/18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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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 水桶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이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살다보면 가끔씩 명확했던 경계들이 모호하게 흐려져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개인적으로는 호접몽처럼 꿈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는 경우 보다는 기억, 감정, 일, 관계 등에서 더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모호해졌으면 하는 경계들은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단단하게 굳어지더군요.


水桶



잠에서 깨어 반쯤 꿈인 것처럼
수통을 들어 물을 마셨다

쿨럭쿨럭 물이 들어오는 내 몸
피 눈물 애액 오즘 고름이 차고 빠지는

수통 속의 물 부어진
내 몸이 수통인지
수통인 내 몸이
내가 들고 마신 수통인지

느닷없이 장주의 나비를 생각하는 여름 한밤

이 물 한 모금.
정말 어디서 온 것일까
문지방을 넘는 목울대가 긴 별들
몸속으로 까마득히 흘러드는 이 물소리는?

2008/07/16 00:05 2008/07/16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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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석 - 매미

매미


매미가 운다
중앙공원 인근 우체통 옆
밤의 나무 그늘에 우표처럼 붙어서

이 밤중에 자지 않고 웬 울음?
불빛 밝아 낮인 줄 아나?
그보다는 더 그리우니까?

그러니까 그리우니까?
아직도 서로 완전히 오지 않아서
불빛 아래 차오르는 그늘의 수위를 재며
우리는 가로수 그늘 아래 마주 서 있고

매미는 새벽까지도 울음 그치지 않네
이산가족들 만나 껴안고 우는 사진 구겨진
신문 덮고 집 없는 이는 저 구석에서 자는데

오직 울음으로 만나질 제짝 그려
지하에서 한사코 지상에 올라온 것들
제 모든 걸 울어 밝혀 잠 못 드는


학교를 졸업하고 가끔 연락을 하고 지내는 선배가 어찌어찌하여 내 블로그에 들어왔던 모양이다. 갑자기 잡힌 회식으로 술을 한잔 하고 들어가는데, 문자가 왔다.

"넌 여전히 문지파로구나! 조만간 한번 보자.."

문지파.. 그러고보니 시집을 고를 때, 문학과 지성사 시인선을 주로 읽는 사람을 문지파, 창작과 비평 시인선을 좋아하는 사람을 창비파라해서 나름대로는 치열하게 문학적 성향(?)을 토론했던 기억이 난다.

뭐 이제는 찾기 편하고 눈에 보이는 책들을 집어드는 쪽에 가까우니 성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자체가 희미해졌다고 봐야겠지.

장마 치고는 내리는 것도 시원치 않고, 덕분에 날씨는 선선하고, 장마가 지나고 나면 모든 걸 울어 밝혀 잠 못 드는 놈들 때문에 시끄럽겠지만, 그 울음 소리가 문득 그리워진다.

2008/06/19 14:53 2008/06/19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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