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 - 석유를 사러

석유를 사러
 

싸늘한 지폐 한 장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초단파 수신기를 타고 칼립소 뱃노래가 들린다
그러나 여기는 추워
타오르지 않을 때는 난로마저 손과 발을 얼린다.
그럴수록 눈을 냉정히 닦고 바라보기로 해
책상 위에 하얀 타자기
키판은 고른 옥수수알 같이 박혀 있고
그것들보다 더 단정한 모습으로 지폐는 누워 있다.
아침에 나는 저것으로 라면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어떡하지 이 밤은 겨울도 참지 못해
큰 바람 소리로 신음하고
눈물만큼의 기름이 저 난로에는 없다.

점점 한기는 예리한 창을 갈아 내 허리께를 찌른다.
예수의 죽음 확인하던 로마의 병정처럼
두 번…세…번……나는 빨리 결정해야 한다
석유를 사기 위해 아침을 굶기로 할 것인가
굶어죽기보다 먼저 동사할 것인가에 대하여.

원래 선택이란 좋은 잔을 마련하고 결정을 요구하지 않는 것
네 앞에 놓여진 잔 가운데 최선의 것을 택하면 되리라
그렇다면, 그래. 석유를 사서 갈등이 끝난다면
당장 사버리는 게 좋지 않은가
약간의 석유가 겨울을 유예하고
따뜻함이 이 저녁의 동사를 몰아낸다면
만나 그것으로 즐겁지 않겠는가
 
석유를 사기로 한다. 그러자 신의 둥근 후광인 듯
얼었던 방은 생각만으로 더워지고
될수록이면 상상이 식기 전에 양말 하나를 더 신고
때묻은 목도리를 한다.
기름통은 신발장 근처에 버려져 있었고
거미줄이 쳤다. 손잡이에 묻은 먼지를 닦고 들어올릴 때
가득 채워지기 위해 한층 가볍게 들리는 기름통의 무게

여간 즐겁지가 않다. 서두를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별들과 가로등 사이로 난 희미한 길을 더듬어
서두를 필요가 없다. 나는 주유소가 바라보이는 신작로 앞에서
지나가는 차들을 천천히 보내 주었다.

좀더 오래 기다리며
가슴속에서부터 더워지는 공기를 느끼고 싶기에
느릿느릿 걸어 유리로 만들어진 집
붉다란 입간판이 주인집 문패보다 큰 주유소 마당에 서서
여보세요, 여보세요 부른다
그러면 유리에 묻은 성애보다 두터운 외투를 입은
소년이 나오지. 졸면서 기름 호스를 잡지
나는 기름이 통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본다
그리고 얼마나 빨리 소년의 작업은 끝나는 것일까

계기는 오백원이 가리키는 숫자쯤 해서 멈추고
돈을 치른다. 하지만 너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유다가 스승을 팔기 위해 고심한 만큼
또한 내게 결정하기 어려웠던 몫
등을 돌리고 성에를 풀어 놓은 거대한 누에 속으로
재빨리 소년이 사라지면 나는 올 때보다 천천히 걷는다

난관을 모면하기 위하여 무엇인가 시도한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내일 굶주린다 해도, 겨울에 따뜻해지는 일은
꿈꾸는 일보다 중요하다.
처음보다 질긴 채찍으로 바람은 내 등을 후려치지만
난로가 있어 기름통을 가지고
밤 늦게 걸을 수 있는 자는 또 얼마나 행복한가?
어느 틈에서인지 한 방울씩의 석유가 새고
몇 개 전주 너머의 너의 방이 별보다 밝게 반짝일 때
그때인가. 나는 끝없이 걷고 싶어졌다.
끝없이 걸어,

동쪽에서 떠오르고 싶었다.
대지를 무르게 녹이는 붉은 해로 솟아나고 싶었다.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복숭아씨 같은 입을 딱딱 벌리며
무서운 대머리다. 불타는 기름통이다.
아아 매일 아침 내 가슴에 새겨지는 희망의 시간들을
무어라고 부를까.


기름값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들려온다. 뭐 예전에도 간혹 기름값 인상이라든지 가짜 휘발류 등등 입에 오르내릴 때가 있었고, 그럴 때마다 이 시를 떠올리곤 했다.

배부른 팔자 좋은 가난뱅이들이 넘쳐나던 자취시절. 그 때도 춥고 배고픈 것이 제일 힘들었다.

시골에서 보내온 쌀이 있으니 찬장 구석을 굴러다니는 라면 스프를 끓여서라도 시장기는 어떻게 해결이 가능했지만, 기름이 떨어져 냉기가 스미는 방바닥만큼은 정말 견디기가 힘들었다. 가지고 있는 옷을 있는대로 껴입고, 이불 밑으로 드라이기를 틀어대면서 서로가 서로를 부둥켜 안고, 작은 온기를 나누곤 했었던 그 시절에도 모두들 이 시를 돌려 읽으면 낄낄거리곤 했다.

누가 먼저 시작한건 아니었는데, 그렇게 벌벌 떨다가 조금씩 숨소리가 가늘어져갈 때쯤 잠들지 않은 누군가가 조용히 시를 읽으면 다른 사람들은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곤 했던 기억이 난다.

여름에도 춥고, 겨울에도 따뜻한 생활을 한지 오래. 아마 그때 그시절로 돌아간다면, 가까운 찜질방으로 도망치지 않을까? 게을러진 몸뚱아리가 슬프다.

2008/06/16 15:34 2008/06/16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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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 하늘꽃

하늘꽃


날씨의 절세가인입니다
얼마나,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이 텅 비는 것 같습니다
앞서 떨어지는 눈송이들에 걸려
뒷눈송이들이 둥둥 떠 있는
하늘까지 까마득한 대열입니다
저 너머 깊은 天空에서
어리어리한 별들이 빨려들어
함께 쏟아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빨려들어
어디론가 쏟아져버릴 것 같습니다
모든 상념이 빠져나간 하양입니다
모든 소리를 삼키고
하얗게 쏟아지는 눈 오는 소리
나를 호리는 발성입니다

몇 걸음마다 멈춰 서
묵직해진 우산을 뒤집어 털어
길 위에 눈을 돌려줬습니다
계단골이 안 보이도록 쌓인 눈
아무 데나 딛고 올라가려니
자꾸만 웃음이 비어져 나옵니다
내 방에 들어서 문을 닫으니
호주머니 속에 눈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황인숙 시인의 리스본行 야간열차를 이제서야 다 읽었습니다. 지난번 올린 글을 찾아보니 한달 전이네요.

어제 밤, 일찌감치 자보겠다고 술을 한잔 했는데도 이상하게 잠은 오지 않고, 설상가상으로 어설프게 먹은 술이 깨려는지 머리는 아파오고, 조금만 더 지체를 하다가는 해가 떠버릴 것 같아 안절부절 못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샤워를 하고는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나른한 기분 속에서 책장을 넘기다가 자전거를 탈 컨디션은 안된다는 이유로 올라탄 출근길 버스 안에서 마지막 장을 덮었습니다.

모든 시가 다 좋았지만, 이제 한참 더워지고 있으니 이게 어떨까 싶었습니다.

심야영화 3편을 연이어 보면서 아침을 맞는 경우는 요즘도 종종 있습니다만, 체력이 된다면 책을 읽으면서 밤을 밝히는 것도 제법 괜찮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보면 학교 때는 꽤 자주 있었던 일이었는데 말이죠...)

2008/06/11 15:02 2008/06/11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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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 ! / 굿모닝 베트남

!


오래 견딘 눈물 같은 것이었을까
주르륵 일직선을 그으며 떨어지다가
출렁, 한 방울 이슬로 맺혔다

저렇게 흘러내리다가
일순간 떨어지는 것들의 힘

처박히면서 똘똘 뭉쳐 바닥을 파고들며
작고 둥글고 깊게
정수리 한가운데 못을 박았다

누군가의 문장에 찍힌 너를 보며
오랜만에 가슴이 더워진다


아직 내게도 다른 사람의 느낌표를 보며 뜨거워질 무언가가 가슴에 남아있는 것일까?

언제부터인지 ... 걱정없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누군가에게 미안해진 그 순간부터 내 가슴은 까닭없이 눈물짓고 그 때마다 조금씩 차가워져 갔다.

'눈물이 많다는 것은 비겁하다는 증거'라는 노래 가사를 들었던 적이 있다. 나는 세상에 솔직히 부딪히는 것 보다 먼저 악어의 눈물을 배워버린 것일까?

굳어버린 가슴에 소리굽쇠 한조각 품고 싶은 날이다.


굿모닝 베트남


내 어눌한 시 창작 수업 듣는 베트남 학생 찌엥꾸억빠오
모국어 두고 남의 나라 시 떠듬떠듬 따라 읽는 응웬티반쭉
나는 너희 나라에 미안해 버스 내리면 바로 보이는 호프집
굿모닝 베트남에 한번도 가보지 못했다
거기 앉아 차창밖으로 흘러가는 밤 풍경을 그윽히
바라볼 수 없었다 안락의자에 앉아 담배를 꼬나물고
굿모닝 굿모닝 활기찬 아침을 노래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베트남 가는 군인들을 태극기로 보내며
부산항 중앙부두에서 열렬히 열렬히 진군가를 부르며
베트남에 상륙해 베트남을 짓밟을지도 모르겠다
너희 나라 굿모닝 굿모닝을 박살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바다를 건너온 승전보에 환호성 지르며
폐허가 된 땅 위에 또 한다발의 폭탄을 내리꽂았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떻게든 학점이라도 잘 주어야겠다고 작정하고 있는데
너희는 교실을 나가는 나를 따라나서며 자꾸자꾸 묻는구나
한국 말이 어렵다고 한국이란 나라가 어렵다고 더듬거리며
미안하구나 찌엥꾸억빠오, 응웬티반쭉, 너희만 아니라
너희 이름 하나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나도 어렵구나
이제 그만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너희 모국어로 말하려무나
코리아가 그랬지 않느냐고 코리아가 그때 우리를 퍼붓지 않았느냐고
배고픈 입냄새가 풀풀 나는 찌엥꾸억빠오야
내 어릴적 춘궁기처럼 야위고 자그마한 응웬티반쭉아

2008/05/20 00:39 2008/05/20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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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윤 - 아카시아 길

아카시아 길


슬픔이 있는
너의 모습이 좋아라
눈물 흐르는
너의 향기가 아파라

호젓한 아카시아 길
홀로 걸으며
주렁주렁 늘어진

나의 슬픔들
온 산을 덮으며 타오르는데

잠시 바람에도 흐느끼는 향기
내 마음 그 어디를 찾아 흐르나
슬픔이 있는 너의 모습이 좋아라
눈물 감추는
너의 향기가 좋아라


벌써 며칠째.

꽃은 보이지도 않는데, 향기만 코 끝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향기를 맡을 때마다 주위를 두리번거려 봅니다만, 어디에도 보이질 않습니다.
한 낮의 햇살이 따갑게 느껴지는 계절이면, 어김없이 온 산을 하얗게 물들였던 아카시아

옛날 생각이 나서 꽃을 따러 가고도 싶은데, 여러가지 핑계(늦은 퇴근, 피곤한 주말, 늘어진 육신)로 머뭇거리고만 있습니다.

2008/05/07 15:05 2008/05/07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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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화 -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안개 속에 숨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어렸을 때는 류시화 시인과 칼릴 지브란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딱히 맘에 안드는 구석이 있었던 것은 아닌데, 지금 생각해보면 누나들이 너무 좋아하니까 반발심 같은게 생긴게 아닌 싶긴 한데,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

동사무소(요즘은 주민센터라고 이름이 바뀐 모양입니다만, 초등학교만큼이나 입에 붙질 않네요.)에 갈 일이 있어서 주민등록증을 찾겠다고 집안을 반쯤 뒤집어 엎다가 책과 책 사이에서 밀리고 밀려 책들의 안쪽으로 밀려들어가 있던 놈을 찾았습니다.

책의 먼지를 털어내고, 바래버린 세월을 느끼면서 추억을 읽었습니다. 오랫만에 참 평화로운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바닥에 흩어진 책들은 상당히 정신 사나운 수준이었습니다만... -_-)


안개 속에 숨다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인기척과 함께 곧 들키고 말지만
안개속에서는
가까이 있으나 그 가까움은 안개에 가려지고
멀리 있어도 그 거리는 안개에 채워진다
산다는 것은 그러한 것
때로 우리는 서로 가까이 있음을 견디지 못하고
때로는 멀어져 감을 두려워한다
안개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누구나 고독하고, 그 고독을 들킬까 굳이 염려하지만
안개속에서는
삶에서 혼자인 것도 여럿인 것도 없다
그러나 안개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머무를 수 없는 것
시간이 가면
안개는 걷히고 우리는 나무들처럼
적당한 간격으로 서서
서로를 바라본다
산다는 것은 결국 그러한 것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면서
안개 뒤에 나타났다가 다시 안개 속에 숨는 것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2008/04/25 10:08 2008/04/25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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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기 - 꿈에도 별은 찬밥처럼

꿈에도 별은 찬밥처럼


정부미 上品을 일반미라 속여 파는 둘째고모
를 가진 친구가 봉천동 비탈길
이마 위에 떠 있는 늘 부지런한 별을 보고
자꾸 인공위성이라고 부득부득
우겼다 별이 별이 아니라는 物證을
확보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기도 했지만
인공위성이 아니라는 設이 해외 토픽에도
밤 아홉시 뉴스에도 나지 않았다 그 겨울의
별은 찬밥처럼 부정적으로 빛났다
밤은 더듬더듬 깊어가고
깊어갈수록 다가오는 살아 있거나
죽어 있는 물고기의 마른 입술 같은 꿈
그 꿈 같은 어둠의 기슭
전염된 하루가
눈 감은 내 곁을 지날 때
모든 것을 빼앗긴다 나는 더불어 잃어버리면서
잎이 지는 폭력으로 숨을 가린다
내가 숨쉴 때 숨죽이고
내가 숨죽일 때 두근거리는 몇 그루의 나무 혹은
황폐한 벌판을 달리는 불빛
귀에 익숙한 숨소리가 불빛에 흰 가슴을
드러낸다 아직 눈뜨지 않은 투명한 그림자
누구일까
새와 동일하게 걷고 있던 사람들이
다시 한번 길을 멈추고
허리를 펴는 나무는 스스로
숲이 되어 숲이 아닌 것을 가리고
상처처럼 웃고 있는 저 아득한 눈빛은

인적을 드러내며 예정에도 없는 비를 맞는다 어제에 이어
계속 빗나갈 예정을 가지고
내가 우긴 별을 믿는 만큼
믿음의 거리에
믿음이 가지를 뻗은 만큼 가지를 쳐서
잎이 무성한 만큼 나를 허물며
흩어지는 반짝이는 네온사인 같은 적막함
그 흔적을 들여다보는 듯 서 있는
몇 그루 어려서 죽은 나무 잊혀지지 않는
몇 개의 전화번호 그리고 밤
이 찬란한 어둠의 무대 위에서
너는 쓰러져 울지 않고 처음부터
보이지 않는 冠을 쓰고 이별처럼
아 이별처럼 번쩍이며 進軍하는
하염없는 너

공원을 달리던 부푼 바람이
제풀에 목을 매고
쓰러져 있던 사람들이 물거품처럼
일어선다 용기를 붙들고
안간힘을 다해 휴가를 즐기고
겨울 山으로 소리를 지르러 가고 개미들은
담배를 피우며 허물어진 집을 다시
세운다 귀가 길에
한번 깨진 이마는 취기처럼 아물고
줄지어 앉아 있던 의자들이
울음을 삼키고 숲으로 달아났다
나는 그날 돌아왔다 별과 함께
십진법으로 세어지던 밤의 숫자 놀이는
한때 절망이었지만 깨끗한 꿈속처럼
체온을 훌훌 벗고 누우면 아득하지만
즐거웠다 인간의 탈을 벗고
그 숲한 기다림의 제복을 벗어버리고
나는 애원하는
내 최후의 껍질을 산산이 돌로 찍어냈다
즐거운 피는 멈추지 않고
그 밤의 짙은 안개는 소스라쳐 울었다

친구에게 얻다시피 산 쌀부대에서
바구미들이 기어나왔다 쌀 속에 묻힌 채
쌀을 먹고 사는 바구미가 쉴새없이 부대를 뚫고
기어나왔다 필사적으로
시끄러웠다 그리고 며칠째 나는
내 몸에서 뛰쳐나오는 수많은 바구미의 悲鳴을
역력히 보았다

-이창기 꿈에도 별은 찬밥처럼 중에서



이창기 시인의 "꿈에도 별은 찬밥처럼"이라는 시집을 주문해 놓고, 책이 도착하는 며칠을 참지 못해 찾아 올립니다. (인터넷에 책을 주문하는건 이 점이 참 안좋은 것 같아요. 발품을 팔면 바로 읽을 수가 있는데 말이죠.)

시는
http://blog.naver.com/nireno?Redirect=Log&logNo=80013207887
http://blog.naver.com/nawanuri?Redirect=Log&logNo=30010952992

위의 두 개의 블로그에서 찾았구요. 댓글을 달아 허락을 받고 싶었으나, 두분 모두 로그인 한 사람에게만 댓글을 허용 하셔서 링크를 답니다.

아직 책을 받지 못한 상태여서 위의 내용이 시의 일부인지 시의 전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책에서 확인하는대로 다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2008/04/21 14:55 2008/04/21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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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남 - 분꽃이 피었다 /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痛症)

분꽃이 피었다
 

분꽃이 피었다
내가 이 세상을
사랑한 바 없이
사랑을 받듯 전혀
심은 바 없는데 분꽃은 뜰에 나와서
저녁을 밝히고
나에게 이 저녁을 이해시키고

내가 이 세상에 오기 전의 이 세상을
보여주는 건지,
이 세상에 올 때부터 가지고 왔다고 생각되는
그 悲哀보다도 화사히
분꽃은 피어서 꽃 속을 걸어나오는 이 있다.
저물면서 오는 이 있다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痛症)


죽은 꽃나무를 뽑아낸 일뿐인데
그리고 꽃나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목이 말라 사이다를 한 컵 마시고는
다시 그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잘못 꾼 꿈이 있었나?
 
인젠 꽃이름도 잘 생각나지 않는 잔상(殘像)들
지나가는 바람이 잠시
손금을 펴보던 모습이었을 뿐인데
 
인제는 다시 안 올 길이었긴 하여도
그런 길이었긴 하여도
 
이런 날은 아픔이 낫는 것도 섭섭하겠네


한 여름, 햇살이 너무 따가워 마당에 물을 뿌리고 있을 때면, 언제나 화단 한 구석에서 조용히 피어있던 분꽃이 생각났습니다.

조용히 피어서 조용히 머물다가 조용히 지는 꽃이었는데, 어머니께서는 왜그리도 분꽃을 좋아하셨는지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분꽃에 대한 추억은 꽃을 따서 꽃술을 길게 늘여 귀걸이를 만들어 차거나, 까맣게 영근 꽃씨를 한움큼 모아서 새총으로 날리고 놀던 기억뿐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조금씩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하고, 햇볕이 쨍쨍한 날이면, 마당 한구석 붉은 벽돌로 경계를 올린 작은 화단과 그 화단 가득 피어있던 분꽃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토록 조용하던 그 풍경이 시나브로 제 가슴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2008/04/19 12:41 2008/04/19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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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철 - 너 누구니 / 그리움에 대하여 / 지금은 아무도 없으니

너 누구니


가슴속을 누가 쓸쓸하게 걸어가고 있다.
창문 밖 거리엔 산성의 비가 내리고
비에 젖은 바람이 어디론가 불어가고 있다.
형광등 불빛은 하얗게
하얗게 너무 창백하게 저 혼자 빛나고
오늘도 우리는 오늘만큼 낡아버렸구나.
가슴속을 누가 자꾸 걸어가고 있다.
보이지 않을 듯 보이지 않을 듯 보이며 소리없이.
가슴속 벌판을 또는
멀리 뻗은 길을
쓸쓸하게
하염없이
걸어가는
너 누구니?
너 누구니?
누구니, 너?
우리 뭐니?
뭐니, 우리?
도대체.


그리움에 대하여

 
라일락 향기 같은 것
봄 같은 것
바람 같은 것
교실 창 너머 낮은 지붕위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같은 것
그 흔들림
그 따듯함
문득 뒤돌아보면
너는 없는데

어린 시절 책갈피에 끼워두었던
작은 풀잎 하나
한잎의 사랑
잠이 깬 봄밤
나뭇가지 끝에 걸린
작고 푸른 달
그 구름속에 가려진
먼 그리움


지금은 아무도 없으니


지금은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으니
보여다오, 너의 가슴을
가슴에 있는 부드러운 사랑과 못난 미움과
꽃과 가시와 양과 늑대도
보여다오, 지금은
아무도 없으니.
보여다오, 너의 감추어진 곳을
거기에 있는 풀밭과 못된 함정과
피 흐르는 상처와 예리한 칼날도
보여다오, 지금은
아무도 없으니.


요즘 퇴근길 골목을 돌아돌아 집으로 올라가다 보면, 느닷없이 라일락 향기가 날 덮치곤 한다.
 
그 향기가 얼마나 진하고 향기롭게 몸을 두드려대는지 멍하니 딴 생각을 하며 가다가도, 나도 모르게 주위를 둘려보며 라일락 나무와 그 끝에 소복하게 매달려있는 꾳들을 쳐다보며 뜻모를 웃음을 한번 짓고는 다시 걸음을 옮기곤 한다.

봄이 저 멀리 가버리기 전에 온 몸에 멍이 들도록 맞아봐야겠다.
(하긴 그렇게 따지면, 가을까지는 이놈 저놈 때린다는 놈들이 줄을 서있긴 하구나... -_-)

2008/04/17 20:16 2008/04/1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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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두석 - 성에꽃 / 전태일

성에꽃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이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다니며 보고
다시 꽃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낸 정열의 숨결이던가
일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


2002년인지 2003년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한 학기동안 최두석 시인의 수업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수업 제목이 "시의 이해"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용은 리얼리티 시란 무엇인가 ?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인의 수업을 들으면서 기존에 제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도 많은 변화가 있었구요.

학기가 모두 끝나고 제가 느낀 점은 뭐랄까? 낭만시는 모르겠으되 리얼리티 시를 쓰기에는 제가 너무 어리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여전히 어린 것 같습니다.



전태일


   달 없는 어둠 속을 검게 숨죽여 흐르는 강물, 별들은 모두 선잠 깬 듯 깜박거린다. 한사코 그늘에서 그늘로만 옮겨디디며 살아온 자의 생애가 오늘밤 급한 여울을 이루며 흘러내린다.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물살이 한 줄기 도도한 강물로 흐른다. 문득 물결을 타고 어룽더울 두꺼비 한 마리 헤엄쳐 오른다. 무겁게 알 밴 몸이 물살을 따라 흐르다가 다시 자맥질 하며 거슬러오른다. 마침내 기슭으로 기어올라 엉거주춤 뒷발에 한껏 힘을 주고 두리번거린다. 가슴을 벌럭이며 결연히, 어찌할 수 없는 천적 독사를 찾아나선다. 그리하여 드디어 온몸으로 잡아먹힌다. …… 이제 며칠 후면 독사의 뱃가죽을 뚫고 수백 마리 새끼 두꺼비가 기어나오리라. 독사의 살을 먹으며 굼실굼실 자라리라.

2008/04/15 11:22 2008/04/15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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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선기 - 먼지 / 호주머니 속의 시

먼지


검은 잎사귀의 9척 장신 나무가 우거진
새로 이사온 아파트가 어둡다
무슨 먼지가 이리도 많을까.
어머니는 온종일 먼지 걱정을 했다
한 해가 가도 먼지는 좀처럼 줄지 않았다
집을 비운 날은 가구 위로
도무지 알 수 없는 먼지의 양이 있었다
나는 서걱서걱 눈을 굴리며 책을 읽었다

여름이 오자 어머니는 검은 잎사귀 나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목욕 바구니에 수상한 잎사귀를
따 넣기도 했다 가을이 오고 어머니는
먼지가 되셨다

나는 먼지가 무서워졌다
아내가 나가는 날이면 안양천변에서
공연히 산책을 했다
어린 여고생들이 둥둥 떠서 귀가했다
먼지가 몰려들 갔다

나는 먼지 하나 없는
두 손을 아내에게 내밀었다

주일 저녁 성당에서 모임이 있었다
아내가 정중한 교우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남편은 먼지 같은 사람이라고
솔직히 말했다



호주머니 속의 시


어느 하루 나는
팔레스타인의 한 시인을 본 적이 있다

어느 날 그는 강당에서
세계 시민들을 향해
울고 있었다
시를 읽으며
울고 있었다

어느 하루 나는
그 시인의 시를 적어
호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의 시를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어느 하루 나는
시의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세계의 구석 어느 어둠 속에서
흐느끼던,

시의 소리를 들었다
2008/04/11 12:53 2008/04/11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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