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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 어두워지는 순간

어두워지는 순간


  어두워지는 순간에는 사람도 있고 돌도 있고 풀도 있고 흙덩이도 있고 꽃도 있어서 다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바람이 불고 불어와서 문에 문구멍을 내는 것보다 더 오래여서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하늘에 누군가 있어 버무린다는 느낌,
  오래오래 전의 시간과 방금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을 버무린다는 느낌
  사람과 돌과 풀과 흙덩이와 꽃을 한사발에 넣어 부드럽게 때로 억세게 버무린다는 느낌.
  어두워지는 것은 그래서 까무룩하게 잊었던 게 살아나고 구중중하던 게 빛깔을 잊어버리는 아주 황홀한 것.
  오늘은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얻으러 간 사이 어두워지려 하는데
  어두워지려는 때에는 개도 있고, 멧새도 있고, 아카시아 흰 꽃도 있고, 호미도 있고, 마당에 서 있는 나도 있고..........그 모든 게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개는 늑대처럼 오래 울고, 멧새는 여울처럼 울고, 아카시가 흰 꽃은 쌀밥 덩어리처럼 매달려 있고, 호미는 밭에서 돌아와 감나무 가지에 걸려 있고, 마당에 선 나는 죽은 갈치처럼 어디에라도 영원히 눕고 싶고.........그 모든게 달리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개는 다른 개의 배에서 머무르다 태어나서 성장하다 지금은 새끼를 밴 개이고, 멧새는 좁쌀처럼 울다가 조약돌처럼 울다가 지금은 여울처럼 우는 멧새이고, 아카시아 흰 꽃은 여러 날 찬밥을 푹 쪄서 흰 천에 쏟아 놓은 아카시아 흰 꽃이고.........그 모든 게 이력이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오늘은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베러 간 사이 어두워지려 하는데
  이상하지, 오늘은 어머니가 이것들을 다 버무려서
  서당골에서 내려오면서 개도 멧새도 아카시아 흰 꽃도 호미도 마당에 선 나도 한사발에 넣고  다 버무려서, 그 모든 시간들도 한꺼번에 다 버무려서
  어머니가 옆구리에 산미나리를 쪄 안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세상이 다 어두워졌네.

 
 
너무 긴장을 했는지 끊어질듯 팽팽해진 정신이 좀 풀어질까 싶어 들어간 서점에서 집어들게 된 시집이 문태준 시인의 '맨발'이었다.

시 한편을 읽을 때마다 시계를 힐끗거리고, 심장은 쿵쿵거리고, 해는 구름 사이로 숨었다 나섰다를 반복하면서 내 눈을 두드려대고 ...

도저히 집중할 수 없고, 진정되지 않는 상황에서 유독 이 시 한편이 내 마음을 편안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한참 시를 써보겠다고 손가락을 움찔거리던 시절, 시는 축약되고, 반복되고, 어려운 무엇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렇게 함축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시가 쓰고 싶어졌다.

내 마음을 오롯이 담아내면서도 읽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시.

문득 그런 시가 쓰고 싶어졌다.

2009/11/17 10:38 2009/11/17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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