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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 샴푸의 요정

시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1) -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이라는 길고도 왠지 묵직해보이는 책에 올라간 시들이 어떤 것들인가 살펴보다가 문득 '장정일'이라는 이름에 시선이 멈췄습니다.

'많은 시 중에서 어떤 시가 올라갔을까?'하고 살펴보니 '샴푸의 요정'이라는 시가 있네요.

'음..? 샴푸의 요정? 빛과 소금의 노래 제목하고 똑같네? 혹시???'

찾아보니 역시나 이 시가 노래로 옮겨진 것 같습니다. 장정일 시인하면 몇몇 소설들이 이미 영화화 됐고, 시 중에서도 '요리사와 단식가'라는 시가 '301, 302'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된 것은 알고 있었지만, 노래로 만들어졌다는 건 몰랐네요.

마침 점심시간이라 시간도 있고 해서, 서둘러 노래를 수배해 놓고, 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샴푸의 요정


사내는 추리극장이 싫다. 국내 소식이
싫고 운동경기가 싫고 문제의 외화가
싫다. 안 본다. 그리고 방송출연하는
많은 다른 여인들이 역겹다. 나는 그녀만을 본다.
여덟 시 반의 그녀를 기다린다. 보시겠읍니까
15초 동안 그녀는 샴푸회사를 위해
광고하지요. 보시겠읍니까

그녀는 인사를 잘한다. 안녕하셔요
그녀는 미소띠며 속삭인다
파란 물방울 무늬 잠옷을 입고
그녀는 머리를 감아 보인다. 무지개를 실은
동글동글한 거품이 티브이 화면을 완전히
메운다. 그러면 샴푸의 요정이 속삭이는 거지
새로 나온 샴푸, 당신이 결정한 샴푸라고
향기가 좋은 샴푸, 세계인이 함께 쓰는 샴푸
아마 당신은 사랑에 빠질 거예요
라고 속삭이는 것이지

미용주식회사가 있다. 아시아 굴지의
미용주식회사가 있다. 그리고
우리들에겐 요정이 있다. 현존하는 유일한 요정
매일 저녁 여덟 시 반, 티브이 화면을 찢으며
우리 곁에 날아오는 샴푸의 요정. 그녀는 15
초 동안 지껄이고
캄캄한 화면 뒤로 사라진다. 여덟 시 반.
매일 저녁 여덟 시 반에는 그녀가
출연하는 광고가 있다. 기다려 주세요

광고가 끝나면 사내는 무기력하게
티브이를 꺼 버린다. 매일 저녁 15초가 필요할 뿐
사내는 사진을 들여다본다. 짝사랑하는
그녀 사진을 사내는 모은다. 방에 붙이기도 한다
흰 이를 드러내고 웃는 모습. 수영복을 입은 모습
승마복을 멋지게 입은 사진을 그는 모은다.
그리고 칼에 대어 잘라낸다. 샴푸의 요정이
어느 영화에 출연해서 보여주는
곧 입술이 닿으려는 찰나의 남자 배우 입술을
면도날로 잘라낸다.

선전문안이 들끓는 밤 열 한 시
나지막이 샴푸의 요정이 속삭이지 않는가
그녀의 노래가 귓전에 맴돌지 않는가.
쓰세요, 쓰세요, 사랑의 향기를
느껴 보세요. 그리고 그녀의 약속이
가슴속에 고동치지 않는가. 오늘 밤
당신을 찾아가겠어요, 광고 속에서
그녀는 약속했었지. 욕망이 들끓는 사내의 머리통

옷을 벗는 요정. 담배불 자국이 송송한 소파에
비스듬이 눕는 요정. 신비스레 신비스레
가라앉는 요정. 뜨거운 입술로
이리 오세요 예쁜 아기, 속살거리는 요정
환영이 들끓는 밤 열 두 시, 이윽고 샴푸의 요정은
그의 머리를 끌어당겨
냄새를 맡아 본다. 제가 권한 것을 쓰셨겠지요
물론 그러하셨겠지요?

0시 삼십 분. 사내는 샴푸가 아닌
다른 이야기가 하고 싶다. 무언가
시도하고 싶다. 그러나 그녀는 실내화를 끌며
얼마나 잽싸게 달아나는가. 참 잘하셨어요
샴푸는 역시 우리 것이 최고랍니다. 계속
애용해 주세요. 분홍빛 잠옷을 끌며
샴푸의 요정은 사라진다. 아아
좀더 있어 주세요! 좀더!

꿈에서 깨어나
사내는 타자기를 두드려댄다.
딱딱딱딱딱
굴지의 미용주식회사가 있다.
그리고 현존하는 유일한 요정은
샴푸요정이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장정일스럽다고 해야할까? 거침없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됐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최근 1년 사이 제가 벌이고 있는 일련의 행태들이 대상만 조금 다를 뿐 시 속의 사내처럼(시 속에서도 사내는 '나'가 되었다가 다시 '우리'가 되기도 합니다.) 정신적 수음에 헐떡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힘드네요.

시를 읽다가 시를 통해서 제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보게 된 것인지, 그저 괜한 생각을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나오네요.

그 문제는 우선 접어두고, 그저 문득 드는 생각은 장정일 시인의 시를 읽은지가 참 오래됐다는 겁니다.(사실 이런 느낌이 싫어서 의도적으로 피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퇴근길에 한 권쯤 사서 오랫만에 머리 구석구석을 난도질 당해보는 것도 꽤나 이 겨울에 어울리는 일이 아닌가 싶네요.

2009/01/07 15:56 2009/01/07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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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 석유를 사러

석유를 사러
 

싸늘한 지폐 한 장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초단파 수신기를 타고 칼립소 뱃노래가 들린다
그러나 여기는 추워
타오르지 않을 때는 난로마저 손과 발을 얼린다.
그럴수록 눈을 냉정히 닦고 바라보기로 해
책상 위에 하얀 타자기
키판은 고른 옥수수알 같이 박혀 있고
그것들보다 더 단정한 모습으로 지폐는 누워 있다.
아침에 나는 저것으로 라면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어떡하지 이 밤은 겨울도 참지 못해
큰 바람 소리로 신음하고
눈물만큼의 기름이 저 난로에는 없다.

점점 한기는 예리한 창을 갈아 내 허리께를 찌른다.
예수의 죽음 확인하던 로마의 병정처럼
두 번…세…번……나는 빨리 결정해야 한다
석유를 사기 위해 아침을 굶기로 할 것인가
굶어죽기보다 먼저 동사할 것인가에 대하여.

원래 선택이란 좋은 잔을 마련하고 결정을 요구하지 않는 것
네 앞에 놓여진 잔 가운데 최선의 것을 택하면 되리라
그렇다면, 그래. 석유를 사서 갈등이 끝난다면
당장 사버리는 게 좋지 않은가
약간의 석유가 겨울을 유예하고
따뜻함이 이 저녁의 동사를 몰아낸다면
만나 그것으로 즐겁지 않겠는가
 
석유를 사기로 한다. 그러자 신의 둥근 후광인 듯
얼었던 방은 생각만으로 더워지고
될수록이면 상상이 식기 전에 양말 하나를 더 신고
때묻은 목도리를 한다.
기름통은 신발장 근처에 버려져 있었고
거미줄이 쳤다. 손잡이에 묻은 먼지를 닦고 들어올릴 때
가득 채워지기 위해 한층 가볍게 들리는 기름통의 무게

여간 즐겁지가 않다. 서두를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별들과 가로등 사이로 난 희미한 길을 더듬어
서두를 필요가 없다. 나는 주유소가 바라보이는 신작로 앞에서
지나가는 차들을 천천히 보내 주었다.

좀더 오래 기다리며
가슴속에서부터 더워지는 공기를 느끼고 싶기에
느릿느릿 걸어 유리로 만들어진 집
붉다란 입간판이 주인집 문패보다 큰 주유소 마당에 서서
여보세요, 여보세요 부른다
그러면 유리에 묻은 성애보다 두터운 외투를 입은
소년이 나오지. 졸면서 기름 호스를 잡지
나는 기름이 통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본다
그리고 얼마나 빨리 소년의 작업은 끝나는 것일까

계기는 오백원이 가리키는 숫자쯤 해서 멈추고
돈을 치른다. 하지만 너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유다가 스승을 팔기 위해 고심한 만큼
또한 내게 결정하기 어려웠던 몫
등을 돌리고 성에를 풀어 놓은 거대한 누에 속으로
재빨리 소년이 사라지면 나는 올 때보다 천천히 걷는다

난관을 모면하기 위하여 무엇인가 시도한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내일 굶주린다 해도, 겨울에 따뜻해지는 일은
꿈꾸는 일보다 중요하다.
처음보다 질긴 채찍으로 바람은 내 등을 후려치지만
난로가 있어 기름통을 가지고
밤 늦게 걸을 수 있는 자는 또 얼마나 행복한가?
어느 틈에서인지 한 방울씩의 석유가 새고
몇 개 전주 너머의 너의 방이 별보다 밝게 반짝일 때
그때인가. 나는 끝없이 걷고 싶어졌다.
끝없이 걸어,

동쪽에서 떠오르고 싶었다.
대지를 무르게 녹이는 붉은 해로 솟아나고 싶었다.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복숭아씨 같은 입을 딱딱 벌리며
무서운 대머리다. 불타는 기름통이다.
아아 매일 아침 내 가슴에 새겨지는 희망의 시간들을
무어라고 부를까.


기름값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들려온다. 뭐 예전에도 간혹 기름값 인상이라든지 가짜 휘발류 등등 입에 오르내릴 때가 있었고, 그럴 때마다 이 시를 떠올리곤 했다.

배부른 팔자 좋은 가난뱅이들이 넘쳐나던 자취시절. 그 때도 춥고 배고픈 것이 제일 힘들었다.

시골에서 보내온 쌀이 있으니 찬장 구석을 굴러다니는 라면 스프를 끓여서라도 시장기는 어떻게 해결이 가능했지만, 기름이 떨어져 냉기가 스미는 방바닥만큼은 정말 견디기가 힘들었다. 가지고 있는 옷을 있는대로 껴입고, 이불 밑으로 드라이기를 틀어대면서 서로가 서로를 부둥켜 안고, 작은 온기를 나누곤 했었던 그 시절에도 모두들 이 시를 돌려 읽으면 낄낄거리곤 했다.

누가 먼저 시작한건 아니었는데, 그렇게 벌벌 떨다가 조금씩 숨소리가 가늘어져갈 때쯤 잠들지 않은 누군가가 조용히 시를 읽으면 다른 사람들은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곤 했던 기억이 난다.

여름에도 춥고, 겨울에도 따뜻한 생활을 한지 오래. 아마 그때 그시절로 돌아간다면, 가까운 찜질방으로 도망치지 않을까? 게을러진 몸뚱아리가 슬프다.

2008/06/16 15:34 2008/06/16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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