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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성 - 저문 강에 삽을 씻고

몇해 전, 그러니까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큰 비가 왔었습니다.

큰아버지는 "지난 밤 어머니가 꿈에 나오셨다." 며 식구들을 소집했고, 산길을 헤치고, 물길을 헤쳐 찾아간 산소는 그야말로 목불인견이었습니다.

산 꼭대기부터 쓸려 내려온 흙은 무지막지한 힘으로 봉분과 비석을 쓸어다 산 아래 냇가에 내팽게쳤고, 우리는 그 속에서 할머니의 비석을 찾아 산을 올랐습니다.

토막난 비석을 무덤 앞에 세우고, 서둘러 봉분을 올리고, 물길을 냈습니다.

그러는 동안 큰아버지는 할머니의 산소 앞에 꿇어 앉아 하염없이 울었고, 아버지는 그런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불만스럽기도 한 모양인지 "그래도 형은 맏이라고 어머니가 꿈에도 나오시네, 나한테는 한번을 안오시더니만..." 라며, 말끝을 흐리셨습니다.

진흙이 덕지덕지 들러붙어 걸음을 걷기도, 흙을 퍼내기도 힘들어진 신발과 삽을 흐르는 물에 씻으면서 등 뒤로 흐르는 흐느낌도 세찬 물줄기에 함께 쓸려내려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2009/01/28 11:26 2009/01/28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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