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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 악어를 위하여

악어를 위하여


자 덤빌 테면 덤벼봐
악어는 정글 속 가장 깊은 곳에서
이를 갈며 기다리고 있다
복병처럼 숨어서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세상이여
나의 납작해진 뒤통수를 보아라

질척질척한 늪, 진흙 속을 뒹굴며 헤엄치다
가끔 열려 있는 하늘 위로 홀로 비상하는 것들을 보면
악어는 입을 쩍 벌린다
단 한 입에 끝내주겠다는 듯이

이 정글의 어떤 사내도
그놈을 길들일 순 없지
어느 새벽녘, 여린 풀잎의 꿈들이
놈의 슬픔을 어루만질 때
진흙 밑에 숨겨오던 희고 부드러운 배를
슬쩍 드러내겠지만

정오의 햇살 사이로 숲이 뜨거운 입김을 뿜어내는 계절
몇 발의 총성이 울리는 어느 날
사냥꾼들은 맥주로 검은 수염 적시며
승리의 모닥불을 피우는 그 순간에도
그 이름을 두렵게 불러볼 것이다

악명 높은 동물이여
죽어서 고급 피혁 제품으로 변신한 뒤에도
복종하지 않는 자의 최후가 갖는 비장미를 자랑하며
번쩍이는 그 이름. 으, 악, 어


요즘 책을 거의 읽지 못했습니다.

자꾸 읽어서 채워도 어느 순간 바닥을 드러내버리는 얄팍한 감성의 소유자이면서도 노력하지 않았으니 글을 올릴 수 있을리가 없다고 생각을... 반성을...

그래도 계속 놔두면 빈 집 같아 보일까봐 걱정스러워 시 한편 올립니다.

진은영 시인의 시는 이미지가 강하게 남는 편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시인의 시를 읽다가 다른 글을 읽으면, 왠지 싱거운 느낌을 떨쳐버리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계속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때는 저도 "누구든 걸리기만 해봐라 꽉 물어줄테다!!!"라고 다짐하면서 세상을 살았던 시절도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 마음마저 닳고 닳았는지 아무 생각없이 그저 제 얼굴처럼 둥글둥글 사는게 목표가 되고 말았네요.

날도 덥고, 일도 힘드니 오랫만에 마음 속에 옹이 하나 새겨넣고, 키워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네요.

여러모로 당분간 좀 독해져볼까 합니다. ^^

2010/08/13 19:31 2010/08/13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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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 갇힌 사람, 70년대산(産)

갇힌 사람
  - 기형도에게


그는 내 안에 갇혔다
그리고 슬픔은 그의 안에 갇혔다
그는 예전과 달리 여유가 조금 생겼다. 공원의 좁은 나뭇잎들
아래로 천천히 걷다가 사다리로 올라가
하늘을 뜯어버렸다, 구멍을 막아놓은 판자처럼
빗방울
혹은 별과 검은 빛이 쏟아질 테고
너는 바라볼 것이다,
라고 그는 생각할 테지만

나는 여전히 분주했다. 뜯지 않은 서류가
쌓여있고 오후의 햇빛은 빛났다
그가 가는 곳을 신경 쓸 겨울조차 없었다, 그러므로
무엇인가 흘러나와 먼지투성이
푸른 종이를 적셨지만 내 탓은 아니다
그런 저녁이면 참
이상하기도 하지, 돌계단에 앉은
그의 곁에서 늙은 개가 축축한 밤의 뺨을 핥는 것이다
달이 조각칼로
지나가는 날들과 죽은 나무들의 껍질을 벗긴다
환하게, 문득
은빛 기둥이 드러난다

아 그렇군, 아주 오래 전
나는 어둡고 부드러운 세월과 결혼한 적이 있다
자두나무 두 그루 사이에 걸린
희미한 기타소리 같은 얼굴
그 세월이 데려온 슬픔의 의붓자식
모든 청춘이 살해된 뒤에도 살아남을
비명의 공증인, 그는
내 안에 갇혔다


쉽게 읽히고 이해된다고 해서 쉬운 시가 아니고, 어렵게 느껴지고 뜻을 알 수 없다고 해서 어려운 시가 아닌 것처럼 진은영 시인의 시는 제게 언제나 어려운 시였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읽으면 가슴 한 구석이 아릿해지는 그런 시'를 찾으면 전 언제나 진은영 시인의 시를 건내주곤 했습니다.

오랫만에 다시 잡은 시인의 시집은 여전히 묵직하고, 아프게 제 가슴을 울리는군요.

이번 주말엔 비가 좀 왔으면 좋겠고, 뜨거운 커피가 그리울만큼 서늘했으면 좋겠고, 그 누구도 그립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70년대산(産)


우리는 목숨을 걸고 쓴다지만
우리에게
아무도 총을 겨누지 않는다
그것이 비극이다
세상을 허리 위 분홍 훌라후프처럼 돌리면서
밥 먹고
술 마시고
내내 기다리다
결국
서로 쏘았다

2010/06/24 13:25 2010/06/24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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