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눈 푸르다
아무런 발자국 없다
흩날리던 간밤의 생각들
어디서 끊어졌는지
쓰러진 눈송이로 잠들었는지
사나운 눈보라 거느리고 먼길을 와서
보는 새벽 눈 푸르다
최승호, 눈사람, 세계사, 1996.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살았을 때의 어떤 말보다
아름다웠던 한마디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이 잎을 노랗게 물들였다.
지나가는 소나기가 잎을 스쳤을 뿐인데
때로는 여름에도 낙엽이 진다.
온통 물든 것들은 어디로 가나.
사라짐으로 하여
남겨진 말들은 아름다울 수 있었다.
말이 아니어도, 잦아지는 숨소리,
일그러진 표정과 차마 감지 못한 두 눈까지도
더이상 아프지 않은 그 순간
삶을 꿰매는 마지막 한땀처럼
낙엽이 진다.
낙엽이 내 젖은 신발창에 따라와
문턱을 넘는다, 아직은 여름인데.
불쌍한 사람들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드넓은 평원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벌판에서
오버바이에른**의 알프스 산기슭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던 소들이
아름다운 풍경 밖으로
사라졌다
목부도 보이지 않는다
풀 한 포기 없는 콘크리트 축사에 갇혀
인공 골분 사료를 되새김질하며
몸무게를 불리던 소들은
푸른 초원이 그리워 마침내
미쳐버렸다
비실비실 미끄러지다가 넘어지고
도살되어 네 다리를 쭉 뻗은 채
태연하게 불타는 소
불쌍해라
고기를 태워버리는 육식 인종
착유기로 우유를 짜내던 축산 농민들
그리고 불쌍해라
값싸게 기른 보람도 없이
재만 남기고 사라진
수백만 마리의 소 값 때문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미쳐버린 사람들
* 독일의 북동쪽, 덴마크와 맞닿은 평원 지대.
**독일의 남서쪽, 바이에른의 고원지대
며칠 전 목은 마르고, 가진 건 오천원짜리 문화상품권 한장이 전부, 시집을 사고 남은 돈으로 음료수나 하나 마셔야지 하고 서점에 들어갔다가 시집 가격이 오천원이라 한참을 고민하다가 사들고 나왔다. 부끄럽다.(나 왜이러니...ㅠㅠ)
김광규 시인은 일상의 풍경들을 따뜻하게 읊어내면서도 우리가 돌아봐야할 것들에 대해서 따끔한 일침을 가하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이 글에 적은 '불쌍한 사람들' 역시 그런 범주에 있다고 본다. 김광규 시인은 시를 참 젊게 쓴다. 나는 시인의 약력을 보기 전까지 30대 중반이나 후반 정도를 예상했으나 1941년 생이라는 말에 쓰러져야했다. 대단하신 정력이고, 감각이 아닐 수 없다. 존경스럽다. ^^
아직 시집이 반쯤 남았다. 앞으로 어떤 시가 또 내 가슴을 뛰게할지 너무 기대된다. 읽은 내용보다 남은 내용이 점점 줄어드는 것에 지독한 아쉬움이 남는 느낌. 정말 오랫만에 느끼는 설레임이다.
고래처럼
깊은 바다, 빛이라 해도 이르지 못하는 어둠
그 깊은 곳의 고래
어둠 속을 살기 위해
실핏줄들이 얼마나 팽팽한 현이 되는지
얼마나 많은 피가 소용돌이치며
제 몸을 바닥에서 밀어올리는지
고동소리만으로도 세상이 폭풍치는 듯하다
태아 적 어머니의 몸속에서 듣던
폭풍의 눈과도 같은 고요
떠오르기 위한 삶의 한가운데에는 폭풍이 있다
김수영, 로빈슨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창작과 비평사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