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 월요일 아침

월요일 아침


월요일 아침이면 나는 우울하다
찌부둥한 몸뚱이 무거웁고
축축한 내 영혼 몹시 아프다
산다는 것이 허망해지는 날
힘없는 존재 더욱더 무력해지는 날
일터와 거리와 이 거대한 도시가
낯선 두려움으로 덮쳐누르는 날
월요일 아침이면 나는 병을 앓는다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로 나를 일으키는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의 이 엄중함
나는 무거운 몸을 어기적거리며
한 컵의 냉수를 빈속에 흘려보낸다
푸르름 녹슬어가도록 아직 맛보지 못한
상쾌한 아침, 생기찬 의욕, 울컥이면서
우울한 월요일 아침 나는 또다시
생존행진곡에 몸을 던져넣는다

박노해, 참된 시작, 창작과 비평사, 1993.
2007/12/24 00:24 2007/12/24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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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 - 멸치

멸치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이 쉬고 있는 바닷속
지느러미의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남아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갔던 것이다
모래 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집히는 이 멸치에는
두껍고 뻣뻣한 공기를 뚫고 흘러가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이 작은 무늬가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었던 것이다
2007/10/04 18:16 2007/10/04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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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살았을 때의 어떤 말보다
아름다웠던 한마디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이 잎을 노랗게 물들였다.

지나가는 소나기가 잎을 스쳤을 뿐인데
때로는 여름에도 낙엽이 진다.
온통 물든 것들은 어디로 가나.
사라짐으로 하여
남겨진 말들은 아름다울 수 있었다.

말이 아니어도, 잦아지는 숨소리,
일그러진 표정과 차마 감지 못한 두 눈까지도
더이상 아프지 않은 그 순간
삶을 꿰매는 마지막 한땀처럼
낙엽이 진다.
낙엽이 내 젖은 신발창에 따라와
문턱을 넘는다, 아직은 여름인데.

2007/09/27 18:18 2007/09/27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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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원 - 物證

物證


아프리카 탕가니카湖에 산다는
肺魚는 학명이 프로톱테루스 에티오피쿠스
그들은 폐를 몸에 지니고도
3억만 년 동안 양서류로 진화하지 않고
살고 있다 네 발 대신
가느다란 지느러미를 질질 끌며
물이 있으면 아가미로 숨쉬고
물이 마르면 폐로 숨을 쉬며
古生代 말기부터 오늘까지 살아
어느 날 우리나라의 수족관에
그 모습을 불쑥 드러냈다
뻘 속에서 4년쯤 너끈히 살아 견딘다는
프로톱테루스 에티오피쿠스여 뻘 속에서
수십 년 견딘는 우리는
그렇다면 30억만 년쯤 진화하지 않겠구나
깨끗하게 썩지도 못하겠구나
2007/09/21 13:22 2007/09/21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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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 가는 비 온다

가는 비 온다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들에게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 비……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까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뚱 그곳에 간다
이를테면 빗방울과 장난을 치는 저 거위는
식탁에 오를 나날 따위엔 관심이 없다
나는 안다, 가는 비……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누구도 죽음에게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 버리는
가는 비……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2006/12/30 17:20 2006/12/30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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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목 - 우물

요 근래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저는 결국 '지름신'이 내려와 '나에게 힘이되는 카드'로 4 권의 책을 지르고야 말았습니다. 역시 지름신의 힘은 강력하더군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싸인은 끝나있고, 가방은 묵직하더라는.....-_-;;

4권의 시집 중에 한권은 군대간 애인에게 하루에 한편씩 써서 보내주고 싶다고 말하는 어떤 여인네에게 선물로 드렸고, 남은 3권 중 제일 처음 읽기 시작한 것이 신용목 시인의 "그 바람을 다 걸어야한다"라는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시집이었습니다. 읽던 중 함께 읽고 싶은 시가 있어서 한편 올려봅니다.

우물

학미산에 다녀온 뒤 내려놓지 못한 가시 하나가 발목 부근에 우물을 팠다
찌르면 심장까지 닿을 것 같은

사람에겐 어디를 찔러도 닿게 되는 아픔이 있다 사방 돋아난 가시는 그래서 언제나 중심을 향한다

조금만 건드려도 환해지는 아픔이 물컹한 숨을 여기까지 끌고 왔던가 서둘러 혀를 데인 홍단풍처럼 또한 둘레는 꽃잎처럼 붉다

헤집을 때마다 목구멍에 닿는 바닥
눈 없는 마음이 헤어 못 날 깊이로 자진하는 밤은 문자보다 밝다 발목으로는 설 수 없는 길

별은 아니나 별빛을 삼켰으므로 사람은 아니나 사랑을 가졌으므로
갈피 없는 산책이 까만 바람에 찔려

死火山 헛된 높이에서 방목되는 햇살 그 투명한 입술이 들이켜는 분화구의 깊이처럼
허술한 세월이 삿된 뼈를 씻는 우물

온 몸의 피가 회오리쳐 빨려드는 사방의 중심으로 잠결인 듯 파고드는 봄 얼마간
내 아픔은 뜨겁던 것들의 목마름에 바쳐져 있었다
2006/01/20 23:50 2006/01/20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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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진 -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믿었던 사람의 등을 보거나
사랑하는 이의 무관심에 다친 마음 펴지지 않을 때
섭섭함 버리고 이 말을 생각해 보라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두 번이나 세 번 아니 그 이상으로 몇 번쯤 더 그렇게
마음 속으로 중얼거려 보라
실제로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지금 사랑에 빠져 있거나 설령
심지 굳은 누군가 함께 있다 해도 다 허상일 뿐
완전한 반려란 없다.
겨울을 뚫고 핀 개나리의 샛노랑이 우리 눈을 끌 듯
한때의 초록이 들판을 물들이듯
그렇듯 순간 일뿐
청춘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그 무엇도 완전히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란 없다.
함께 한다는 건 이해한다는 말
그러나 누구 나를 온전히 이해 할 수 있는가
얼마쯤 쓸쓸하거나 아니면 서러운 마음이
짠 소금물 처럼 내밀한 가슴 속살을 저며 놓는다 해도
수긍해야 할 일
어차피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일
상투적으로 말해 삶이란 그런 것
인생이란 다 그런 것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혼자가 주는 텅빔
텅빈 것의 그 가득한 여운
그것을 사랑하리라
숭숭 구멍 뚫린 천장을 통해 바라뵈는 밤하늘 같은
투명한 슬픔같은
혼자만의 시간에 길들라
별들은
멀고 먼 거리 시간이라 할 수 없는 수많은 세월 넘어
저 홀로 반찍이고 있지 않은가
반짝이는 것은 그렇듯 혼자다
가을날 길을 묻는 나그네 처럼 텅빈 수숫대 처럼
온몬에 바람소릴 챙겨 넣고
떠나라
2005/08/30 22:54 2005/08/30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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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규 - 불쌍한 사람들

불쌍한 사람들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드넓은 평원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벌판에서
오버바이에른**의 알프스 산기슭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던 소들이
아름다운 풍경 밖으로
사라졌다
목부도 보이지 않는다
풀 한 포기 없는 콘크리트 축사에 갇혀
인공 골분 사료를 되새김질하며
몸무게를 불리던 소들은
푸른 초원이 그리워 마침내
미쳐버렸다
비실비실 미끄러지다가 넘어지고
도살되어 네 다리를 쭉 뻗은 채
태연하게 불타는 소
불쌍해라
고기를 태워버리는 육식 인종
착유기로 우유를 짜내던 축산 농민들
그리고 불쌍해라
값싸게 기른 보람도 없이
재만 남기고 사라진
수백만 마리의 소 값 때문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미쳐버린 사람들

* 독일의 북동쪽, 덴마크와 맞닿은 평원 지대.
**독일의 남서쪽, 바이에른의 고원지대


며칠 전 목은 마르고, 가진 건 오천원짜리 문화상품권 한장이 전부, 시집을 사고 남은 돈으로 음료수나 하나 마셔야지 하고 서점에 들어갔다가 시집 가격이 오천원이라 한참을 고민하다가 사들고 나왔다. 부끄럽다.(나 왜이러니...ㅠㅠ)

김광규 시인은 일상의 풍경들을 따뜻하게 읊어내면서도 우리가 돌아봐야할 것들에 대해서 따끔한 일침을 가하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이 글에 적은 '불쌍한 사람들' 역시 그런 범주에 있다고 본다. 김광규 시인은 시를 참 젊게 쓴다. 나는 시인의 약력을 보기 전까지 30대 중반이나 후반 정도를 예상했으나 1941년 생이라는 말에 쓰러져야했다. 대단하신 정력이고, 감각이 아닐 수 없다. 존경스럽다. ^^

아직 시집이 반쯤 남았다. 앞으로 어떤 시가 또 내 가슴을 뛰게할지 너무 기대된다. 읽은 내용보다 남은 내용이 점점 줄어드는 것에 지독한 아쉬움이 남는 느낌. 정말 오랫만에 느끼는 설레임이다.

2005/07/16 22:34 2005/07/16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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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 고래처럼

고래처럼


깊은 바다, 빛이라 해도 이르지 못하는 어둠
그 깊은 곳의 고래

어둠 속을 살기 위해
실핏줄들이 얼마나 팽팽한 현이 되는지
얼마나 많은 피가 소용돌이치며
제 몸을 바닥에서 밀어올리는지
고동소리만으로도 세상이 폭풍치는 듯하다

태아 적 어머니의 몸속에서 듣던
폭풍의 눈과도 같은 고요
떠오르기 위한 삶의 한가운데에는 폭풍이 있다

김수영, 로빈슨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창작과 비평사 1996.

2004/04/13 22:19 2004/04/13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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